- 잡힌 물고기의 슬픔.
걷는 걸 좋아하는 나,
걷는 걸 좋아한다던 너,
썸 타던 그때의 우리 참 많이 걸었더랬지.
어둠이 짙게 깔리기 전,
서로의 얼굴이 보일락 말락 해서 더 설레었던 봄날의 저녁.
부른 배도 소화시킬 겸 산책을 먼저 제안하던 너.
즐겨가던 만보산책로,
선선한 바람, 넘실대던 풀냄새, 흙 길 위 우리의 발소리,
나눠 낀 무선 이어폰 사이로 들려오던 감미로운 노래들,
서로에게 알고 싶은 것 투성이라 끊이지 않던 우리의 대화.
한 바퀴로는 부족하다며 한 바퀴 더 돌자는 너.
행여 내가 추워할까 무릎담요까지 챙겨 다니던 너.
영원할 줄 알았던 우리의 공통점.
"날 좋은데 산책이나 갈까?"
"나... 사실 걷는 거 안 좋아해. 다리 아파. "
저녁 먹자마자 드러누운 너의 얼굴은,
동산같이 볼록한 배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구나.
"우리 예전 봄여름에는 주 3회 만보산책로 걸었었잖아?"
"그랬지."
"그땐 다리 안 아팠어?"
"아팠지."
"그럼 참고 걸은 거야? 왜?"
"꼬시려고."
별 일 아니라는 듯 휴대폰을 쳐다보며,
똥집 같은 입술에서 노땅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받아 칠 말을 잃어버린 나는 그저 그 똥집을 쳐다만 봤다.
"원래 남자는 다~ 이런 거야. 잡힌 물고기한테는 정성을 쏟지 않는 법이야. 엣헴."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어느 시대를 살고 있단 말인가?
타임슬립한 조선시대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김수현으로 보내주지.
나보다 얇은 너의 새다리를 보니 무리해서 끌고 나올 수도 없겠다 싶다.
혼자 하는 산책이 익숙했던 나에게 함께 걷는 재미를 알게 해 놓고,
달아난 네가 얄밉다.
혼자 찾은 만보산책로,
산책로가 나에게 물었지.
왜 혼자만 온 거냐고 넌 어딜 갔냐고.
보이지 않니 방구석에 숨어서 바람을 피해 잠을 자고 있잖아.
따뜻한 햇살 내려와도 안 깰 거야, 깊이 잠들었거든.
다시는 너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얘기를 차마 할 순 없었어.
하지만 나도 몰래 내뱉은 육두문자에 들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