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이유따윈 없는 나의 비밀연애

-아직은 연애만 하고 싶어요.

by 코알라

"와이리 늦노~"

"친구 만난다고 얘기했잖아."

"남편 있고 자식 있는 애들이 이렇게 늦게까지 놀아도 되나~"

"아이고 엄마! 11시도 안 됐는데 뭐 그리 늦었다고 잔소리를 하노~ 나도 이제 마흔인데 잔소리는 그만~"

새벽까지 술 마시고 놀다 고주망태로 귀가한 것도 아닌데 오늘도 어김없는 엄마의 귀가시간 잔소리는 적응되지 않고 기분만 상한다.

결혼해서 가정 있는 친구들이 평일 밤 이렇게 자주 자유롭게 나와서 놀 수 있냐는 의심과 네 친구들은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인생의 숙제를 차근차근 해내며 제 할 일 하며 노는데 넌 속도 없냐며 복장이 터진다는 엄마의 한숨'나의 귀가 패키지'가 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엄마의 의심이 맞다.

가정 있고 남편 있고 자식 있는 친구들이 어쩌다 한 번은 모르겠지만 매일 평일밤을 나와 늦게까지 놀 순 없다.

엄마만 한숨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도 삶을 살아가는 나의 태도가 한심하게 느껴져 복장 터질 때가 있다.

계획 없이 속절없이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것인지 걱정되다가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살고 싶은 대로 살자며 머릿속 근심들을 집어던져버린다.


그럼 매일 평일 어디서 뭐 하다 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귀가를 하는 거냐고?

사실 나는 엄마 모르게 연애하는 중이다.




나와 J는 5년 차에 접어든 장기 연애 커플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믿는 J 씨 덕에 1년 365일 중 경조사를 제외한 360일의 저녁시간을 함께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함께 살고 있는 엄마가 연애사실을 모를 수 있냐고?

가는 세월만큼 거짓말이 일취월장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것을 핑계 삼아 스터디 카페에 다녀왔다고 하거나, 외국어 학원 등록을 했다고 하거나, 기타 자기 계발을 위한 배움이나 모임활동을 시작했다고 하거나, 친구들을 만난다고 하거나 등등 내 늦은 귀가의 사유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피해되지 않는 사소한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거짓말이라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스터디 카페 대신 일반 카페에서 몇 시간 글을 쓴다. 단지 저녁시간이 아닌 오후시간에 카페에서 글을 썼다는 점만 거짓이 되어버리므로 한결 마음이 편하다.

학원 등록까진 아니지만 최근 정말 외국어나 배워보자 싶어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심사숙고하여 교재를 고른 뒤 매일 성실히 독학 중이다. 요즘엔 교재만 구입하면 무료 동영상 강의를 들을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생길 아주 근본적인 질문, 왜 엄마에게 연애 사실을 알리지 않고 매일 거짓말을 하느냐?

마흔의 연애는 당연히 '결혼'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가벼울 수 없는 중대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지금 연애 중이고, 퇴근한 남자친구와 저녁 식사 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고 왔다고 하면 엄마의 잔소리가 사라질까?

아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그렇게 허송세월 보낼 거니?"라며 잔소리의 종류만 달라질 뿐이다.


현재 연인이 있으신가요? 네.

연인과 결혼을 계획 중이신가요? 아니요.

비혼주의자이신가요? 아니요.

현재의 연인이 배우자감으론 영 아닌가요? 아니요.

현재의 연인과 혹시 헤어짐을 준비 중이신가요? 아니요.

현재의 연인을 사랑하시나요? 네.


그런데 도대체 왜 결혼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글쎄, 아무리 정색하고 물어도 나도 잘 모르겠다.

학부모가 되고도 남을 나이가 되었지만 결혼에 대해선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결혼한 나를 상상하면 낯설기만 하다.


비혼주의자냐고?

지금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해서 '비혼주의자'라고 나를 소개하는 것도 섣부른 판단이지 않나 싶다.

100세 시대에 고작 40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결혼'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건 누가 정한 것인가? 마흔 쯤되면 모든 걸 다 결정한 상태여야 하는 것인가?


각자의 할 일을 끝내고,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하며 밥을 먹고, 소화시킬 겸 산책로를 거닐며 "정말 가을이 되었다. 바람이 차네."라며 계절의 변화를 함께 느끼다 헤어짐이 아쉬워 내일의 만남을 기대하는 연인으로 지금처럼 J와 이렇게 지내고 싶을 뿐이다.





마흔의 연애라고 어른스럽지 않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나를 보며 "괜찮아?"라며 걱정하기보다는 우습게 넘어진 꼴에 배를 부여잡고 푸하하 웃기부터 한다. 그리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마흔의 연애라고 능숙하지 않다.

"미안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뭐가 미안해?"

"......"

모든 남자들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뭐가 미안한지 얘기해 봐."라는 질문의 답을 J는 여전히 모른다.


마흔의 연애라고 반드시 결혼을 염두하는 건 아니다.

J도 나도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우리가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53세가 된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이 하고 싶어질 수 있다. 그럼 그때 하면 된다.


지금의 '우리'를 충분히 누리기 위해, 엄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비밀 연애가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좋으니까.

다수의 선택과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다거나 문제 있다거나 틀렸다는 것은 아니니까.



언제까지 연애만 하고 있을 거냐는 잔소리 보다 왜 이렇게 늦게 귀가하냐는 잔소리가 훨씬 낫다.

이것이 거창하지 않은 비밀 연애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