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돼. 유치원 가야 해.
-끝없이 생겨난 생각의 '나비효과'
잠들기 전, 꼭 손녀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고 잠드는 엄마의 손녀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가끔 동생네가 조카를 봐달라며 연락이 오는 날이면, 엄마는 만사 제쳐두고 조카를 위한 진수성찬을 준비하는데, 고기를 좋아하는 조카 덕에 덩달아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는 그저 행복하다.
요즘 조카가 새로이 빠져있는 캐릭터는 '캐치핑'으로, 캐릭터들의 작은 피규어를 조금씩 사모으고 있다.
"캐치핑 캐릭터... 한... 40~50개 될걸?"
"캐릭터가 그렇게 많아? 그거 다 사면 돈이 얼마야~"
"다 사주진 못하지. 딱 가지고 놀만큼만 사주려고."
"왜 못 사줘! 저 쪼매한 게 얼마 한다고, 할머니가 다~ 사줄게~"
나와 남동생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엄마가 갑자기 '다 사주진 못한다.'는 동생의 단호한 말에 버럭 했다.
이 맛에 돈 버는 거라며 그 피규어를 반드시 어여쁜 우리 손녀 두 손에 꼭 쥐어 주겠노라 엄마는 다짐했고, 그 말을 들은 조카는 '할머니 많이 사줘, 다 사줘'를 연발하며 할머니에게 안겼다.
나나 좀 사주지... 이런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피터팬이 이 집에 함께 살고 있음을 엄마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헤헷.
주말부부인 동생네는 조카의 유치원 방학기간에 맞춰 돌아가며 연차를 사용하는데 연차를 모두 소진한 올케를 대신하여 엄마와 내가 이틀 동안 조카를 돌보았고, 다음 주 유치원 개학을 앞두고 조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엄마는 이틀 동안 다짐한 대로 40개가 넘는 캐치핑의 피규어 중 13개의 피규어를 구입하여 조카의 두 손에 안겨주었고, 조카 녀석은 '할머니 좋아. 할머니 제일 좋아. 다음에 또 사줘. 다 사줘'를 다시 연발하며 할머니의 지갑을 독차지했다. 부러운 녀석.
죄다 펼쳐내어 자랑 중인 조카
"우리 이쁜 공주~ 이제 가면 또 언제 오나~ 주말에는 아빠, 엄마랑 재미있게 놀고 월요일에 할머니 집에 또 와~ 할머니가 또 캐치핑 인형 사줄게 알겠지?"
할머니의 끊임없는 애정표현에도 조카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신발 신기에 집중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 유치원 가야 해."
너무나 단호한 조카의 한마디가 왜 그렇게 웃기던지 나와 동생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염원하는 캐치핑도 그녀의 유치원 등원은 막지 못한다.
왜냐하면, 월요일은 유치원에 가야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엔 박장대소하게 했던 조카의 말 한마디가 자려고 누운 늦은 밤이 되자 여러 생각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 '너는 너, 나는 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내가 하는 것이고, 네가 해야 할 일이라면 네가 하는 것이다.'
저 어린것도 알고 있는 이 당연한 진리를, 정작 나는 잊고 있었던 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어떤 '확신'에 '가치'를 두고 살고 있었던 걸까? 어떤 '확신'이었든 간에 '견고(堅固)'하긴 했던가?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진 않지만,
만약 깨지고 깎이는 반복되는 상처들에 지쳐버려 결국엔 '나를 지킨다'는 핑계로 얼추 타협하는 것에 급급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신념'을 좀 더 고수했더라면, 내 회사생활이 그렇게 버겁지만은 않지 않았을까?
그렇게 아파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진 않지만,
문득 조카의 단호한 한마디가 나의 과오를 떠올리게 하는 씁쓸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