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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Aug 05. 2020

분노의 폭우 아래 우산 펴기

육아라는 감정 노동 2 : 분노와 애정

아이들은 내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격렬한 고통을 안겨준다. 양가감정이라는 고통이다. 나는 쓰라린 분노와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 더없는 행복에 대한 감사와 애정 사이를 죽을 듯이 오간다.

-에이드리언 리치 [분노와 애정]


테라스에 그릇을 던지면 어떨까? 즉각 머릿속으로 찬장을 열어 지금 당장 깨져도 상관없을 그릇을 찾는다. 하지만 그릇은 깨지면 파편이 생기고 깨진 그릇은 쓰레기고 쓰레기는 내가 치워야 하잖아. 그럼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물병으로 하자. 빈 플라스틱 물병이 바닥에서 퉁, 퉁, 이건 후련하기보다 미련한 소리다. 테라스 문을 열어 분리수거 함에 빗물이 가득 고인 것을 발견하고 손으로 민다. 가만히 서 있던 분리수거 함은 영문도 모르고 빗물을 토하며 바닥에 나뒹군다.


아이가 이유식을 거부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뒤 내게 일어난 일이다.


지금은 이렇게 잘 먹는다!


소설에서 분노는 주인공을 움직이게 한다. 스토리를 진행하고 싶은데 인물이 꼼짝 않고 있으면, 나는 그 인물이 화를 낼 만한 이유를 찾아본다. 그 인물의 존재를 부정당하거나, 소중한 것을 빼앗기거나, 무언가를 원하는 데 쉽게 얻을 수 없는 상황 등, 건강한 분노는 추진력의 연료가 되고 이야기의 갈등을 유발하며 결말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육아에서 분노란 고통 그 자체가 아닌가? 아이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감정의 폭우와 맞서는 법


우는 아이의 찡그린 얼굴마저 사랑스럽다. 동시에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에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화가 난다. 이렇게 사무치게 사랑하는데 왜 화가 나는 걸까? 어떻게 돌도 안 된 아이에게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내 온몸을 산산조각 낼 기세로 타오르는 감정이 분노일 리 없다고 부인한다. 아이는 잘못이 없다. 이유식이 낯설어 입에 잘 맞지 않았을 뿐이다. 먹기 싫다는 의사를 표현할 언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우는 것이다.


이성이 나를 설득하는 동안 내 몸은 반도 더 남은 이유식 그릇을 싱크대에 패대기치고 테라스 문을 열어 지금 소리를 지르면 옆집과 윗집에서 찾아올 확률을 따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명소리는 폐가 되니까 샌드백처럼 소리 없이 마음껏 두드릴 만한 물건이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우리 집엔 샌드백이 없어. 대신 내 허벅지를 때린다. 모기를 잡는 손길로 가장해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 최대한 아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허벅지 위에 앉은 모기를 잡는다.


피멍으로 얼룩진 허벅지를 긴 바지로 가리고 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고 분유를 주고 안아 준다. 내가 말을 하면 내 입모양을 유심히 살피며 웃는 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햇님처럼 빛이 난다. 폭우처럼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던 분노가 그치고 태양이 젖은 땅을 말린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


감정의 폭우는 예고 없이 나를 덮치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는다. 한 번은 분유를 먹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젖병을 잡고 앉아 흐르는 눈물을 방치했다. 역류방지쿠션에 누워 분유를 먹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혹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 죽여 눈물만 흘렸다.


이 넓은 세상에 나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나는 한 명인데 내가 책임져야 할 삶은 이인분이고 두 명 분의 밥과 잠과 생활을 책임지다 지쳐 나자빠진 내게 다가와 위로라고 건네는 말들은 ‘그래도 애가 순해서 너는 편하게 키운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니?’ 그런 말 앞에서 애써 웃고 뒤로 돌아서 운다.  이 고통을, 이 노력을, 이 노고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절망 속에서 몸속에 쌓인 분노가 눈물에 녹아 비어져 나온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고 내 사랑은 태양만큼 크고 빛나는데 왜 나는 폭우에 흠뻑 젖은 몸을 떨며 이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나. 아이에게 이 괴물을 보여줄 수 없다. 엉망이 된 테라스, 피멍이 든 허벅지, 설거지감이 잔뜩 쌓여 방치된 싱크대, 급격히 늘어난 아기 짐으로 포화상태인 옷방.


오늘도 웃고 울고 웃고 마무리는 항상 웃음으로


비가 오면 우산을 펴고 분노가 나를 지배하려 들면 생산적인 방향으로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는다. 아이에게 쌀과자 하나 쥐어 주고 옷방의 짐을 전부 꺼내 정리한다. 설거지를 하고 싱크대 배수구 안쪽까지 세제를 뿌려 솔로 빡빡 닦는다. 거칠어진 피부에 보습 크림을 바른다. 빗물로 테라스 바닥을 닦는다. 분노가 집 안 구석구석 때를 벗기고 빛을 가져 온다.


한참 움직인 몸은 온통 땀투성이고 과자 하나를 이가 아닌 잇몸으로 녹여 먹은 아이의 몸은 온통 과자 부스러기로 지저분하다. 코 아래 수염처럼 달라붙은 쌀과자 조각이 귀여워 웃는다. 내가 웃자 아이도 따라서 웃는다. 아이를 씻기고 나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침대 위로 눕는다. 무사한 마음으로 우리는 낮잠에 들 것이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한다. 감정이 쏟아지는 장마전선 속 우리는 내가 만든 우산 아래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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