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고 싶지만, 보여주고 싶은 교환학생 시절 일기
브런치를 켜면 아래와 같은 문구가 나온다.
'서랍 속 간직하고 있는 글과 감성'은 엷어지는 글자의 색처럼 낯을 가린다. 브런치는 정말 좋은 플랫폼이지만 나는 이 공간이 피난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대중적인 SNS에 글을 쓰지 않는다. 그런 곳에 글을 쓰는 일은 지나치게 감성적인/진지한 행동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행여나 그곳에 글을 쓰더라도 읽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글이 아닌 사진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유목하던 작가들은 브런치나 블로그 같은 공간으로 떠나게 되었다. 따가운 시선 혹은 무관심 속에, 나 역시 더 이상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어린 시절 페이스북에 쓴 글은 비공개 혹은 삭제를 해버렸고, 장문으로 쓴 인스타그램 게시물들은 '보관' 처리를 해버렸다. 하지만 사실 숨기고 싶다가도 보여주고 싶고, 그러다가도 다시 숨기고 싶은 예전 글들이 많았다. 브런치 소개 문구를 보고 '보관' 혹은 '간직'한다는 이름하에 감춰버린 글들을 다시 꺼내 보고 싶어졌다. (어차피 나의 브런치 구독자 대부분은 나의 지인이기에, 읽으면서 내가 아는 사람이 더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지난 글과 동일 : https://brunch.co.kr/@koblenz/22 )
10. 2018년 8월, 유럽 첫 번째 여행지 스위스에서
융프라우를 가는 기차 안에서 한국인 신혼부부를 만났는데, 너무 잘 어울리셔서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이름도 모르는 분들이지만 기념으로 사진을 함께 찍었다. 스위스는 전압 규격이 다르다는 것도 모르고 무작정 여행을 온 나에게 보조배터리를 빌려준 고마운 사람들. 내 마음도 충전되는 것 같다. 루체른에서 인터라켄 가는 길에 있는 호수 색은 정말 예쁘다.
11. 2018년 9월, 벨기에 겐트에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맛있는 음식도 좋았지만, 겐트 거리에서 만난 피아노 연주 덕에 피곤함을 다 잊었다. 여기 몇 번을 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오늘 연주한 아저씨나 아이들의 노래를 들을 순 없겠지만, 살아가면서 피아노 곡을 들을 때마다 오늘이 기억날 것 같다.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세렌디피티 같은 도시
12. 2018년 9월, 유럽 생활 34일 차의 일기
유럽 34일 차, 레벨업이 없는 요즘의 삶에 대하여.
- 수업이 끝난 후, 젤라또를 사 먹고, 요리하고, 집 앞을 산책했다면 보람찬 하루가 된다.
- 평일에 낮잠을 자고도, 깜짝 놀라며 일어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유롭다.
- 이런 사소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13. 2018년 10월, 오스트리아 빈을 돌아다니며 든 생각
- 벨베데레 궁전에서 매일 산책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 빈의 야경을 감상하는 오늘처럼, 서울에서도 야경을 마음껏 느낄 만큼 여유롭게 살고 싶다.
- 계속되는 여행으로 처음에 느끼던 신선함이 무뎌져 갈 때, 어떤 이유로 나는 계속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14. 2018년 10월, 동유럽 여행을 마치며 부다페스트에서 든 생각 1
머피의 법칙을 믿게 되는 순간에 대하여
몸살에 걸려 숙소에서 하루를 날릴 때, 1day 티켓 2장을 실수로 같은 날짜로 발급받았을 때, 환승 정보를 찾다가 정작 타야 할 버스를 놓칠 때가 그랬다. 익숙하지 못한 환경에서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운은 정말 사소하고 빈번하다. 그리고 나를 괴롭힌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멍청하거나 혹은 불운한 지를 생각하기보다, 즐겁기 위해 온 이 여행에서 그런 불운함을 잊고 어떻게 더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는지이다.
15. 2018년 10월, 동유럽 여행을 마치며 부다페스트에서 든 생각 2
여행지의 모든 곳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움만이 기억에 남는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아름답다. 부의 요새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밝은 낮에 시내의 전망대에서 도시를 바라보면, 내 상상에는 없던 어지러운 시내의 모습도 있다. 물론 이 풍경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어부의 요새에 가면 다들 같은 곳에서 사진을 한 장씩 남기려고 한다. 처음에는 이게 우스꽝스럽다고도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아주 자연스럽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하니까 말이다.
여행지 안에서 유명한 스팟에서만 사진을 찍고, 관광 블럭 밖으로는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누군가 진짜 여행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면서 언젠가 꺼내 볼 멋진 사진을 찍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도시의 명암을 모두 보지 못했더라도 누군가에게 ‘진짜’여행 일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보여줬던 것처럼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나도 그런 사람임을 다시 발견한다.
16. 2018년 11월, 내가 사는 도시 코블렌츠에 대해
유럽에 와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신나는 척 살고 있지만, 유럽에서도 가장 좋은 곳은 독일에 있는 우리 집이다. 한 번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마음먹고 코블렌츠를 둘러보고 왔다.
코블렌츠에서 가장 유명한 건 도이치에크이다. 코블렌츠는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거기에 바로 이 도이치에크가 있다. 독일어 시간에 교수님이 해 주신 말씀에 따르면 코블렌츠라는 이름도 두 강이 만난다는 의미의 ‘Confluence’에서 왔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강을 끼고 위치한 탓에 코블렌츠는 많은 유람선의 시작점이 된다. 도이치에크 그 자체뿐만 아니라 강가에 아름다운 거리와 가게가 많다. 강을 두 개나 끼고 있어서 그런지 도시가 안갯속에 자주 숨어버리는데 그것도 매력적이다.
코블렌츠에는 요새가 있다. 도이치에크 근처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강을 건너서 산 위의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에 올라갈 수 있다. 막상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니 요새보다는 산 위의 공원에 빠져버렸다. 뭔가 스위스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융프라우를 가다가 만난 초원은 너무 커서 두려울 정도였다면, 요새 안의 초원은 딱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산 위에서는 모든 것이 좋다. 공기도 내려다보는 강과 도시의 풍경도 다 좋았다. 너무 좋아서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면 여기서 요양을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보통 여행객분들이 코블렌츠를 올 때는 엘츠성 방문이 목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실 엘츠성은 코블렌츠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코블렌츠에서 기차를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 역에서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어제 나도 엘츠성에 갔다 왔는데, 걸어 올라가는 길이 그리 가파르지 않고 단풍도 예쁘게 들어서 한국에서도 안 하던 단풍 구경을 하고 왔다. 물론 굳이 산을 가지 않아도 코블렌츠 시내 여기저기에서 단풍을 볼 수 있지만!
내가 사는 도시의 그동안 관심 없이 지나치던 곳들이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나도 처음에 누군가 이 도시에 대해 물어보면 별거 없으니 오지 말라고 했던 것 같 같은데, 이제 그 말은 취소하고 싶다. 어떤 도시에 대한 감정은 분명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유럽 여행지로는 인기가 없는 독일, 그리고 그 안의 소도시가 분명 누군가에게 지루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다만 나에게는 이제 ‘우리 도시’가 되고 있는 코블렌츠가 듣보잡 소도시로서 누군가의 선택지에서 그냥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혹시나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기를!
17. 2018년 11월, 포르투갈 여행을 마치며
최상급 표현을 아무 데나 쓰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지만, 포르투갈 여행은 정말 유럽에 와서 한 여행 중에 가장 좋았다.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난 사람들 하나하나 너무 좋아서 다 채우고도 남았다. 좋았던 기억과 다시 오고 싶을 만큼의 아쉬움까지 적당히 남긴 채로 종강 전 마지막 여행 끝! .
18. 2018년 12월, 독일 본에서
독일 역사 수업 마지막 날, 과거 서독의 수도였던 본을 방문해서 역사박물관 투어를 했다. 간 김에 크리스마스 마켓도 구경할 수 있었다. 맨날 놀고먹지만 나름 학생인지라 종강까지 더 놀러 다니기는 힘들 것 같다. 덕분에 집에 오는 길에 들렸던 코블렌츠 시내도 올해는 이게 마지막일 것 같은 느낌이다.
교환학생 생활이 끝나간다. 수기를 읽어보면 다들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하던데 벌써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꿈에서 깨기가 싫다.
19. 2018년 12월, 독일 WHU에서의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며
담아가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던 교환학생 Caden의 4달.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독일에 돌아오겠지만, 막상 내일 살던 집과 독일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학교와 여행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너무 행복했던 시간. 감사한 마음 가득
20. 2018년 12월, 런던에서의 7박을 마치며
너무 좋았던 런던 7박이 끝났다. 런더너처럼 분위기 있는 척해서 좋았고, 직관에서 손흥민이 골을 넣어서 좋았고, 쇼핑에서 바버자켓을 건져서 좋았다. 유럽에서 다시 온다면 포르투갈과 더불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 안녕!
21. 2019년 1월, 아일랜드에서
안녕 아일랜드! 독일을 제외하고 나의 유럽 생활 마지막 나라인 아일랜드, 그래서 더 애착이 갔다. 최근에는 보통 계획 없이 여행을 다니고 있는데 아일랜드에서의 시간도 그렇게 보냈다. 그냥 분위기를 느끼기며 거리를 걸었다. 좋았다. 집주인 Treasa 할머니와 딸 Pearl은 물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했던 아일랜드. 동네 바에서 기네스 한잔 하기 좋았던 아일랜드. 졸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면 이렇게 여행을 위해 긴 휴가를 쓰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다시 오고 싶은 곳이 너무 많다. 또 더블린에서 와서 Treasa 할머니가 해주는 아침을 먹고 싶다. 서른 살 전에 꼭 다시 올 수 있길!
22. 2019년 1월, 반년 간의 유럽 생활을 마치며(유럽 감성주의)
유럽에 와서 가장 심하게 걸린 감기를 베를린에 두고 온 채, 저의 마지막 여행까지 모두 끝이 났습니다! 마지막이라 그랬는지, 감기 때문에 절반쯤 날려 버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베를린 여행은 더 아쉽고 아련하게 남을 것 같아요. 지금은 공항 파업으로 하루 미뤄진 비행기를 코블렌츠에서 기다리며, 이곳에서의 기억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섯 달의 유럽 생활을 마치고 집에 갈 때가 되어서 그런지, 유럽 생활 혹은 여행이 어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좋았습니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인종차별을 당해 크게 기분이 나빴던 적도 없고, 시위나 날씨 같은 외부적인 이유로 여행을 망쳐버린 적도 없었습니다. 특히 여행을 함께 한 친구들이나, 동행분들이 모두 좋아서 빛나는 기억만 가득하네요. 덕분에 특별히 더 좋았던 몇몇 나라나 도시가 있지만, 안 좋았던 곳이 없었어요.(거짓말이 아니라 단순해져서 안 좋은 기억이 잘 기억이 안 나요!) 저랑 여러 번 여행을 같이 해준 친구들, 여행에서 만난 동행분들, 가끔은 길에서 몇 마디 나누고 지나간 이름도 모를 사람들까지 정말 너무 고맙고, 그리울 것 같아요. 다들 보고 싶어요!
혹시나 그래서 뭘 느꼈냐고 물으신다면, 더 이상 거창한 의미를 찾는 것을 접어두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유튜브 김달림과 하마발 채널을 좋아한다, 나는 아일랜드 감성의 홈데코를 좋아한다, 나는 사과향 샴푸를 좋아한다 같은 것들. 아무튼 그래서 올해는 좋아하는 것들을 좀 더 많이 하면서 살 생각이에요.
한국에 돌아가면 보고 싶은 얼굴들이 너무 많지만, 시차 적응할 새도 없이 초등학생들과 놀러 봉사활동을 갑니다! 몸이 좀 힘들겠지만 올해는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걸 더 많이 할 거니까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혹시나 제가 보고 싶은 분들이 있으시다면 설날 이후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나 이 긴 글을 다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미세먼지 조심하시고, 우리 한국에서 만나요!
오래전 쓴 글들을 정리하며 하나씩 다시 읽어보았다. 1편 20대 초반의 글들은 읽으며 부끄러울 때도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감정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글들에 대한 나의 감정이 조금 달라졌다는 점이다. 매번 애정을 가지고 글을 쓰지만, 아주 짧은 생각만 남기고 마는 경우가 있는 반면 이런저런 깊은 생각을 해서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통상 후자의 글에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데, 몇 년이 지나서 읽어보니 오히려 전자의 글이 맘에 드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나는 위에서 15,16번 글에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쓴 것 같은데 이제 보니 10,11번이 더 좋았다. 다른 건 모르겠고 10,11번을 읽었을 때 글 속에 담긴 순간과 그 감정이 가장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마 저 짧은 글에는 제대로 꾸미지도 못한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실려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생각이 많아서 글을 쓴다. 근데 요즘은 생각이 많아서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생각을 한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 귀찮은 일이다. 돈도 안된다. 어차피 읽는 사람만 읽어서 이제는 인스타에 올리더라도 읽는 지인도 많이 줄었다. 기분 탓은 아니고 브런치의 통계가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글쓰기가 침식되는 나의 마음을 보호하고 치유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어디서 깎여나가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글은 마음의 방파제가 된다. 방파제는 소모품이라서 주기적으로 교체를 해주어야 한다. 글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의 방파제 교체를 위해 12월에는 좀 더 많이 쓰고 많이 읽어야겠다.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길었던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왔다. 독감이 유행이다. 따뜻하게 무장하고 다니시길 바란다.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