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봉수 Mar 09. 2022

한적한, 오후의 그린.

26 Greenery 15-0343

"너의 시간을 훔칠 수 없어." 나는 말했다.


 말을 머리에서부터 목을 통해 그리고 하나의 일관된 소리로 내뱉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우주의 법칙과도 같이, 절대적이라는 시간의 '간격' 가볍게 무시하고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상대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기준으로 했을  이는  시간이었다.


"아니야, 너는 반드시 내 시간을 훔쳐야만 해. 간단해. 그저 두 손에 힘을 주고 말 그대로 반으로 딱, 부수면 돼. 심플하지?"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아니 A에게는 말 그대로 정말 심플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각각 발생한 일그러짐 중에서 어찌 되었든 먼저 생겨난 것은 A의 휘어짐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내 일그러짐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 나는 클래식 음악을 전부 잃어버렸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휘어진 무언가를 얻었고,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이 차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으로 새어 나온 일그러짐은 시간을 두어 생겨났을 뿐 다른 차이는 없었다. 선명한 녹색만을 남긴 채, 우리에게 다가온 것뿐이다.


나는 그녀가 건네준 휘어진 조각을 손에는 쥐고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고 있지 않았다. 손안에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 손가락 어딘가에 걸쳐두고 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일이니까 어미새가 알을 품듯이 본능적으로 소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휘어진 조각이 차갑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까지 차가워진 것일까? 미세한 온도의 변화에 나는 순간적으로 내 손과 조각 사이의 단절을 느꼈다. 그건, 공간으로써의 단절 혹은 시간으로써의 단절 중에서 뭐가 맞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휘어진 조각의 온도가 새삼 낯설었다.    


"내가 만약, 이 조각을 너의 말대로 부수면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물었다.  

"아까 말한 그대로야, 너는 내 시간을 갖게 되는 거야." 그녀는 답했다.


"알아, 그건. 그게 아니고 너는 어떻게 되냐고, 그걸 묻는 거야."

"서로 다른 시간에 발생한 일그러짐 중에 하나는 뭐, 사라지겠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야."

"그게 순서로 보면 너한테 생긴 일그러짐이겠지? 그렇지?" 나는 재차 물었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녀는 막연하게 대답을 했다. 그건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녀의 일그러짐이 그 대상일 테니까. 순서상으로도 그리고 나에게 휘어진 조각을 준 이유를 생각해봐도.


말했다. 물었다. 답했다 그리고 재차 물었다. 말의 끝을 나타내는 아주 적은 수의 글자에도 나의 감정은 담겨있다. 거기에는 서로에게 아득히 먼, 그런 침묵의 깊이가 존재할 테니까.


"너의 일그러짐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그다음은?"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고 또 물어보기 가장 겁이 났던 부분이었다. 휘어진 조각을 가볍게 부수고, 그다음에 그녀에게 생겨난 일그러짐이 순서에 맞게 사라진 뒤에는? 이 부분이었다.


이 과정이 결국 내가 그녀의 시간을 훔치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녀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시간을 내가 가져서 얻는 이익이 있다면, 반대로 그 시간을 뺏김으로 인해 생기는 불이익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이니까. 그리고 그 불이익의 대상은 그녀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다시 말할게, 내가 너의 시간을 가지면 너는? 너한테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거야?" 좀 더 직설적으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전 09화 한적한, 오후의 그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