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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Mar 14. 2022

한적한, 오후의 그린.

27 Greenery 15-0343

어쩌면 우리는 깊이가 서로 다른 콘크리트를 어딘가에 두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굉장히 얇은, 또 다른 누구는 상당히 두꺼운 벽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얼마나 깊을지는.


"몰라. 뭐, 아마도 내 시간은 어딘가에서 꼬여버리겠지? 아니면 그저 어긋난 시간으로 남을지도?" 


A는 고민 없이 대답을 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을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의 대답에는 고민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심플하게 돌아온 대답이었을 뿐이었다.


"아니, 그러면 안돼. 적어도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알아야 하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처음부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될지 말이야."

"선명한 녹색이 나를 너한테로 데려다줬다는 게, 그게 중요한 거야."

"그냥 두 개의 일그러짐이 생겨난 거라서 선명한 녹색도 그렇게 생긴 것일지도 몰라. 그저 순서로써."

"맞아, 그게 메인이야. 순서. 그러니까 역으로 돌아가야만 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둘의 대화에는 교집합과도 같은 접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에, 그녀는 결과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 어쩔 수 없다는 방법의 근거는 그저 간격을 두고 일어난 순서라는 것 그리고 역으로 이를 되돌려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아까 잠시나마 후회한 것과 같이 그냥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A가 말을 걸어도 '모르는 사람인데요?' 라며 완곡히 거절을 하고 계속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러한 부질없는 후회에 빠져 잠시 넋을 잃었을 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들려온 발자국 소리에 너무 놀라서 고개를 들어 보니, A가 뒤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으로 다시 입구를 찾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그녀는 이 어두운 공간을 떠나고 있었다. 그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소리가 점점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아득히 깊은 공간을 가득하게 채울 정도로 그 발자국 소리는 뚜렷했다.  


"어디가! 어디 가냐고!"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


아무런 대답도,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깊이와 넓이를 가진 공간이라면, 적어도 여기가 그런 공간이라면 내 목소리 정도는 메아리를 쳐서 돌아올 법도 한데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만 허공을 가득하게 메우고 있었다.


'빨리 그녀를 따라갈까?' 하는 생각은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것에 대해 무섭다는 감정도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이제 뭘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이 순간, 이 공간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뭔가를 해야 한다.'


그 순간, 손안에 얌전히 쥐여있던 휘어진 조각이 느껴졌다. 그건, 이곳에서 그녀의 손 다음으로 확실한 실체를 가진 물건이었다. 차갑기는 했지만 적어도 적당한 부피와 적절한 무게를 가진 확실한 물체였다. 나는 그걸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분명히 휘어져있다고, 이건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가진 근력의 전부를 다 쏟아내어 힘을 주지는 않았다. 그저 어느 정도 힘을 주었을 때, 이 휘어짐이 더 크게 바뀔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힘을 줘도 내가 가진 능력으로는 이걸 부수기에 한계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은 그런 본능적인 확인이었다.


조각은 작은 소리를 내며 위, 아래로 진동을 했다.


나무 의자가 차가운 공기를 만나 뒤틀리며 소리를 내는 것처럼 휘어진 조각은 내 힘에 반응을 하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뒤틀림은 미세한 진동을 만들어 내 손의 감각을 하나하나 일깨웠다.


'그녀의 휘어진 조각을 부러뜨릴 수 있다.'


그녀의 말처럼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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