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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Mar 20. 2022

한적한, 오후의 그린.

28 Greenery 15-0343

나는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그녀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저녁이 끝나고 밤이 찾아오는 찰나의 순간, 해가 지는 그 시간과 같이 빠르게, 아주 빠르게 그녀의 발자국 소리는 자취를 감춰나갔다. 나에게서 그리고 이 공간에서. 공간을 울렸던 소리가 완전하게 사라지고 나니 조금은 허무한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공백이 찾아왔다. 나의 숨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공간에 혼자 남겨진, 이 공백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방법이 아주 간단하리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진 힘으로 충분히, 너무나도 가볍게 그걸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휘어진 조각을 손에 힘을 주어 부수면 되는 것'


이게 내가 할 일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남겨진 공백은 계속 나를 망설이게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망설임보다는 무서움이 앞섰다. 내가 할 일의 모든 것을 끝내고 나면? 무엇이 남는 거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남는 것이 좋은 내용이라면 이렇게까지 망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끝내고 남겨진 것은 좋은 내용은 아니다. 적어도 그녀에게, A에게는 그랬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니까,

오늘 처음 본 건데 뭘 그렇게 생각해?

이제 안 보면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라고 한 건 걔잖아? 안 그래?

망설일 필요는 없지, 겁낼 필요도 없고.


나를 위한 대변인은 끝없이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음'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훨씬 더 무섭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조용히 그 대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에게만 보이는, 들리는 대변인은 때로 비겁하다. 나를 위한 것으로 목적을 두어 끝없이 설명하지만 다르게 보면 자기 합리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딱 그 정도의 비겁함이다


'그건 아니야, 비겁해.'


나는 대변인의 이야기에 대답을 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속삭이며 말을 했지만 어찌 됐든 나는 대답을 했다. 나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던 대변인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저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시 침묵과도 같은 공백이 찾아왔다. 내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런 공백이었다.


다시 눈을 감고 밖에서 느꼈던 나뭇잎의 움직임을 생각했다. 바람에 날려 선명하게 보였던 나뭇잎의 그 움직임을 생각해내려 애썼다. 그리고는 온통 녹색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떠올리려 애썼다. 선명한 녹색이 만든 이상한 모습을 상상하려 눈을 질끈 감았다.  


목의 뒤를 스치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그저 그런 상상이 만들어낸 착각이어도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분명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불안정한 호흡을 꾹꾹 눌러 담아 간신히 가다듬고 다시 한번 바람과 나뭇잎을 생각했다.


나뭇잎은 바람에 따라 옆으로 흔들흔들 움직이며 결과적으로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바람이 강하고 세차게 불어도 결국은 아래로 향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뭇잎을 상상하며 흔들림의 끝을 이미 생각해두었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속도와 방향은 제각각이겠지만 나뭇잎은 언젠가 바닥으로 내려온다. 그게 전부였다. 어디까지나 나뭇잎은 그걸 벗어날 수는 없다. 단순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망설임이 없도록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서 손에 담았다. 누가 봐도 이건 부서져버렸다고, 그렇다고 확신이 들게끔 어중간하게 만들지는 않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힘을 주었다. 휘어진 조각은 소리를 내며 진동을 했다. 하지만, 이 진동에 흔들림은 없다. 단순하지만 이 역시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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