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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Mar 01. 2022

한적한, 오후의 그린.

25 Greenery 15-0343

그림자와도 같은, 어쩌면 어둠으로 가득하기만   공간에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끝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없었다. A 걸음이 멈추기 전까지는.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나서야 자연스럽게 나의 걸음도 멈췄다. 그리고 나는 그게  공간의 끝이라고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손을 놓고  혼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공간에 어딘가  넓은 혹은   터널이 있을지라도 나에게는 여기가  끝이다.


"음, 이제 다 온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다 왔어?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어디 또 다른 공간이 있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아마도 여기가 마지막일 거야."

"눈이 여기에 적응을 완전히 하기 전까지는 보기가 힘들겠어. 잘 보여?" 나는 그녀가 막힘없이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게 내심 신기하기도 했다.

"나도 비슷한 것 같아. 근데 여기서는 너무 눈을 믿지는 마. 본능을 믿어. 여기는 그런 곳이니까."

"이상한 말이네, 그래도 일단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나는 그녀의 말이 약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그랬던 것 같다. 뭔가 와닿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무언가가 나에게 와닿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기한 일이다. 그게 어떤 방향과 속도를 가졌더라도 적어도 나의 어딘가 한 부분에 조용히 왔다는 것은 역시나 신기한 일이다.


그때였다. A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을 건넸다.


"자, 받아."

"응? 이게 뭐야? 잘 안 보이는데." 아직 눈이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서 A가 건넨 것이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손을 더듬어 만져보는 수 밖에는 없었다.

"내 일그러짐." A는 내가 더듬어 볼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바로 대답을 했다.

"뭐라고? 왜 그걸 나한테 주는 거야?"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내 손에 남겨진 것은, 그건 확실히 A가 지니고 다녔던 휘어진 조각이었다. 단단하고 매끄럽게 휘어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아니다. 그게 맞는 거아."

"우리는 시간을 훔쳐야 하잖아.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근데 이걸 왜 주는 거지?"

"맞아. 그건 확실해. 근데, 어디까지나 나한테 일어난 그 일그러짐은 네가 겪은 일그러짐에 비하면 과거에 가까워.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가 없을지 몰라." 그녀는 또 이상한 말을 했다.

"그건 알겠어, 뭐 순서라는 거잖아. 근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지를 모르겠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쩌면 일방적인 침묵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A의 고른 호흡도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나에게 말하기 직전의 그런 호흡이 있었다.  


"내 시간을 훔쳐줬으면 해."

"뭐라고?"

"내 일그러짐을 없애야, 너에게 일어난 그 일그러짐에 변화가 있을 거야. 그게 올바른 순서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그 휘어진 조각을 부숴야 해.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 없어."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일방적인 침묵을, 그 정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그녀에게 말하기 직전의 호흡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떤 걸 말해야 할지, 그다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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