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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Feb 18. 2022

한적한, 오후의 그린.

24 Greenery 15-0343

그녀의 손을 의지한 채 내려간, 그림자의 아래에는 공간이 있었다. 통로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동굴과 같은 곳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내려갈 만큼의 적당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각이 온전하게 적응을 하기 전까지는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축축함의 정도를 말해주는 습기나, 추운지 아니면 따듯한지를 말해주는 온도는 없었다. 무취의 공간이라는 말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시각을 제외하고 모든 감각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저곳을 파악해보려는 나와는 다르게 A는 아주 대담하게 그림자의 안으로 들어갔다.


차츰, 시각이 빛과 색에 적응을 해가며 어느 정도 공간을 볼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길이와 폭 그리고 높이를 가진 3차원의 공간이겠거니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발을 내딛고 서있으니 2차원의 공간에 가까웠다. 즉, 이 공간이 가진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발이 닿아있는 바닥은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면적이라는 게 있을 테지만 높이는 아무래도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A와 맞잡은 손을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으로는 주위를 더듬어 보려고 여기저기에 손을 뻗어보았다. 하지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내 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공간이 가진 넓이보다 손의 길이가 짧아서 닿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아득히 먼 허우적거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거꾸로 서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여기는 우주의 무중력과 같을지도 모른다.'

'나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은 다리로 느껴지는 바닥과 그녀의 손 뿐이다.'


나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것에는 정량적인 것과 정성적인 것이 있다. 길이와 높이 그리고 넓이가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저 좌표에 불과하다. 좌표에는 방향이 없다.


따듯한 그녀의 손은 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실체를 가졌다. 무중력 속, 우주의 어둠 속에 있을 지라도 나는 실체를 느끼고 있다.


상대적으로는 한없이 작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실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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