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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Feb 12. 2022

한적한, 오후의 그린.

23 Greenery 15-0343

A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할 뿐이었다.  


우리는 아득히 깊은 그리고 멀게만 느껴졌던 녹색의 공간을 가로질러,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맨 처음 고개를 내밀고 숨어있던 나무로 걸음을 향했다. 모든 것이 선명한 녹색으로 변한 이 세계에, 그림자가 놓여있는 나무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본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내가 가야 할 곳은 나무의 뒤편이라는 생각은 꽤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A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전에 미리 설명을 해주었으면 좀 더 수월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 과정에는 대화가 필요 없었다.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자네들, 준비는 되었나?" 그가 우리를 향해 말을 건넸다.


나는 준비가 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어떤 걸 준비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련의 준비를 떠나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한 '목적'은 그래도 좀 더 분명했다.


"모르겠어요. 근데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 대답을 했다.


대답을 하려고 뒤를 돌아봤던 아주 잠깐의 찰나에 나는 그를 보았다. 거기에는 녹색의 형상이 그대로 서있었다. 구두를 신은 것인지, 옷을 입은 것인지 더 이상 구분이 가지 않는 그대로의 형태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별이란 이런 것인가? 라는 생각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선명하게만 보이던 상대가 이제 더 이상 선명하지만은 않은 그런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쪼록, 잊지 말게나. 휘어져 버린 것과 사라져 버린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일그러짐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게 여기서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인 것 같네.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말이야." 그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말을 했다. 그 목소리가 동굴 속의 울림처럼 너무나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에는 연결이 존재한다. 그 연결이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강도에 따라서는 끊어져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가 닿았다는 사실만큼은 꽤 강력하다.


그의 말이 끝나고,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것을. 하지만 확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목적에 맞게 이곳에서 우리를 맞이했을 뿐이니까.


나무의 뒤편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그림자가 놓여있었다. 모든 것이 선명한 녹색으로 가득한 이 공터에 있는 유일한 그림자였다. A는 망설임 없이 그림자 위에 올라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그 그림자 위에 발을 올렸다.


먼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따라서 흔들리는 나뭇잎도 그리고 모래 먼지도 없어서 분명하지는 않았다.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멈춰있던 공기를 밀어내듯 거기에는 바람이 있었다.


"들어가자. 손을 잡아" A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그림자의 안쪽에 공간(또는 통로가 맞을지도 모르겠다)이 있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천천히 몸을 숙였다. 녹색에 적응되어있던 시력이 다시 어둠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을 들여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몇 번을 했을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공간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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