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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Feb 03. 2022

한적한, 오후의 그린.

22 Greenery 15-0343

"가자, 시간을 훔치러."


나는 자리잡고있던 침묵의 한가운데를 끊고 그녀와 그에게 말했다. 말을 건넨 것이 아니었다. 의견을 묻거나 조율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이건 말을 던진 것에 가까웠다. 그들이 적당한 속도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고민도 물론, 없었다.


말은 역시,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게 대화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일방적인 부분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무언가를 끊어내기 위함이라면 더더욱.


좀처럼, 나는 그런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크게 보면 어떠한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보다는 적당한 속도로 순응을 하며 살아가고 자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더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나의 성격이 불편하거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대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나에게는 나만의 속도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게 누군가가 보기에는 아주 느린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빠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적당한 속도를 가진 그런 성격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에도 이런 성격을 잘 맞았다. 악보 안의 음표가, 순서에 맞게 흘러가는 대로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너무 좋았다. 최소한 싫지는 않았다. 그저 주어진 순서와 주어진 시간에 맞게 움직이는 음표에 나름의 안정을 느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변화를 싫어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때로는 그 변화 자체를 외면하고 거기에서 도망을 쳤다. 그리고는 합리화를 했다.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괜히 여기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라는 식의 합리화였다.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측면에서 그건 굉장히 효율적인 선택이었겠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비효율을 생각할 그럴 용기는 아무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던 것 같다.   


만약,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음표 하나가 혹은 음표 여러 개가 규칙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튀어나간다면 나는 어떨까? 아마도 그 음악을 다시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듣기 싫어서라기 보다는 불편했을 것이다.


나는 클래식 음악의 작곡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역시 '아니다'다. 그러면 나는 왜 내 생각대로, 짐작대로 흘러가지 않은 음표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인가? 내가 그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도 아닌데. 그 작곡가의 마음을 알지 않는 이상, 내 짐작대로 흘러가지 않을 음악일 텐데. (가끔은 내 짐작처럼 흘러갈 때도 있었지만)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은 이래야 돼."


라는 고리타분한 그런 생각이다. '클래식 음악이라면 이렇게 흘러가야지 혹은 적어도 여기서는 이렇게 되어야 하지'와 같은 어딘가 한 부분이 닫힌 마음.


하지만,


지금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닌 만큼,

그리고 쓰여진 음표가 순서와 시간에 맞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 만큼,


그런 나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같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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