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살라와 리빙코랄 그리고 그 해 여름.

01-4 Marsala 18-1438

by 고봉수

"왜 색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를 차가운 단편으로써 말해주는 아련한 기억을 뒤로하고 책상 앞의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아침부터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도 현실로의 복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에게는 이렇게 한가롭게 과거를 추억할 시간이 출근길에서부터 없었다.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군가의 목적’을 위한 적절한 혹은 알맞은 색채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뛰어난 감각(Sense)을 가지고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할 뿐이지 결국 그 감각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실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목적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 그리고 그 관찰을 통해 뽑아낸 추상적인 이미지를 현실적인 상태로 변환하는 것이 작업을 위한 서론이라면 그에 알맞은 ‘아주 적당한 색채를 찾아내는 것' 이 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나는 아마도 이 단계쯤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찾아낸 색채를 '상대방과 나의 목적에 맞게 대입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을 가지며 나아가는 일, 그리고 적당한 포물선을 그리며 궤적을 그리는 일, 적어도 그런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나름의 고민을 가지며 일을 하고 있을 때, 선배가 찾아왔다.


“미스터 그레이, 저녁에 시간 좀 있어? 할 얘기가 좀 있는데.”


“저녁에요? 음, 일단 선약은 없는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아 그래? 다행이네. 뭐 딱히 큰 일은 아닌데... 그건 만나서 이야기해도 될까?”


“네, 그러면 알겠어요.”


“저번에 회식 때 갔던 펍(PUB)으로 갈까? 거기 분위기 좋던데 보니까.”


솔직히 말하면 어디를 가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선배와의 술자리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연한 기회로 선배와 재즈 바(Jazz Bar)에 간 적이 있었는데 누가 보았는지 회사에 소문이 나면서 꽤나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소문의 대부분은 “아니 어떻게 그 선배랑 친해졌어? 단 둘이 술을 마셨다며?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와 같은 아주 일방적인 질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선배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있다. 그 정도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느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는 선배가 가지는 분위기가 그 매력의 중심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걸맞는 아주 적절한 패션(Fashion) 감각은 이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매력의 범주에서 선배를 바라보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주 평범한 축에 속하는 내가 그런 사람과 어떻게 친해졌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가끔은 나도 궁금하기도 하다.


“무슨 이유로 선배와 친해졌을까?”


굳이 이유가 없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어디까지나 선배와의 대화는 즐겁고 그 안에서는 업무의 연장선을 아주 쉽게 잘라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배와의 대화는 나에게는 소중했다.


하지만 대답은 “선배님, 아니면 저번에 갔던 그 카페(Café)는 어때요?” 라고 말을 건넸다.


“음, 그래? 거기가 편하겠어? 그렇다면 상관없어. 이따가 퇴근하고 6시쯤에 그 카페에서 보자.”


“뭔가 대화하기 좋을 것 같아서요. 또 어제 술도 많이 마셨죠? 오늘은 좀 쉬어요 선배.”


“역시 그레이는 배려가 깊어, 그러면 거기서 보는 거야. 잊지 말고.”


“네 알겠어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늦지않게 미리 알려줄게요.”


“응, 이따 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내 자리까지 찾아왔나 싶기도 했지만, 선배와는 남녀를 떠나서 워낙 다양한 소재에 대해 대화를 나눴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업무에 집중을 했다.

다양한 소재를 지닌 대화는 너무나 소중하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공간 그리고 주어진 시간에서 현실을 벗어나 잠깐 동안 주체적인 '간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간격을.


하지만 그 날의 대화는 나의 세계를, 적당한 영역과 범위를 가진 나만의 이 ‘세계’를 완벽하게 다른 부분으로 움직이게 한 시작이었다.


온전하게 자리 잡았던 나만의 세계가 그렇게 이동이 될 줄은 나 조차도 알 수 없었다.


역시, 알 수는 없었다.


그 정도의 변칙을 불러일으킬 대화였는지.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그 중심에 내가 서서히 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전 03화마르살라와 리빙코랄 그리고 그 해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