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살라와 리빙코랄 그리고 그 해 여름.

01-3 Marsala 18-1438

by 고봉수

새벽의 차가운 공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명확한 방향을 찾지 못한 불투명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니 상현과도 같은 달의 한 면만이 밝게 그리고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차갑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을 보니, 따듯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몸을 좀 녹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나오려고 이불을 정리하는 순간,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그녀가 입은 속옷의 한 면이 하나의 형태로써 눈에 들어왔다.

매장에 들려서 같이 속옷을 살 때도 그리고 잠들기 전에 그 속옷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도 이런 느낌이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는데, 새벽 정적에 휩싸여 바라보니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잘 어울린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하게 ‘그렇다고’ 느꼈다. 그 실감은 확실했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로써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어디까지나 그 속옷은 적절한 형태적당한 색감을 드러내며 이 곳에 존재했다.

속옷이 없었다면, 그녀의 몸과 살결은 이음매가 없는 완벽한 연결을 가지며 본연의 아름다움에 더 자연스럽게 어울렸겠지만 지금은 분명히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완벽해 보였다.

오히려 속옷은 완벽한 존재로써 그녀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하나의 사물이 이렇게 자연스러운 형태와 색감을 가지며 누군가의 일부로써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던 것 같다. 완벽한 형태 그리고 색감.


그녀가 여러 속옷을 비교하면서 나름의 기준으로 하나를 구입하기로 결정했을 때, 만약에 이런 자연스러움을 앞서 고민한 것이라면 정말이지 이건 대단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새벽의 차가움에 비친 그 속옷의 색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어쩌면 선명함을 넘어 조용히 그리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다는 순수한 감정이 마음속 어디선가 계속 흘러나왔다.


아직도 “왜 그렇게까지 눈이 갔었을까?” 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명확한 답을 낼 수는 없지만.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면서, 나는 “언젠가 적절한 형태와 색감을 가진 속옷을 선물하고 싶다” 라고 마음을 먹었다. 지금 이렇게 바라보는 ‘완벽함’ 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매장에 서서 이것저것 다양한 속옷들을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고민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형태와 색이 가지는 그 완벽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녀의 결정이 아니라, 나의 결정에 의해서. 그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결정에 의해 준비된 속옷이 그녀에게 잘 어울렸는지 혹은 그런 완벽함을 가졌는지 결국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름의 고민으로 준비한 속옷 을 선물로 주었지만, 얼마 후에 그녀와 이별을 했기 때문이다.

헤어짐의 이유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을 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 정도의 이유와 그 정도의 결과로 “나는 그녀와 이별을 했다” 이 정도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녀의 마음에 들었을까?"


“아니면 속옷을 보면서, 그녀의 다른 남자 친구도 나와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그녀의 기준에 부합하는 속옷이었을까?”


이런 정도의 의문만 남은 채, 그녀와는 더 이상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아주 우연한 기회가 생겨 무언가를 물어볼 기회가 생긴다면 헤어짐의 이유보다는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속옷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인지?” 를 물어보고 싶다.


누가 들으면 아주 속옷에 환장한 녀석이라고 욕을 하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질문 그리고 그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있은 후로 나의 일상은 꽤나 큰 변화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그 연장선의 하나이고 가장 관심을 가지는 ‘색채의 어울림을 찾는 것’ 도 생활의 모든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변화를 가져다준 ‘그녀의 속옷 그리고 그 상징’은 그런 부분에서 끊임없는 의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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