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살라와 리빙코랄 그리고 그 해 여름.

01-5 Marsala 18-1438

by 고봉수

‘본론’ 단계에 쌓여있던 일들을 적당하게 정리를 하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선배와의 약속도 있고 더 이상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에도 너무나 지쳐있던 상황이라 서둘러 작업을 종료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


평소와 같으면 선배와의 가벼운 잡담 혹은 대화를 떠올리며 부담이 없었겠지만, 유독 오늘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저 그런 느낌이겠지만, 아무튼 그런 불편함을 어딘가에 가지며 익숙한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의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좀처럼 가볍게 사라지지 않았다.

카페에 도착을 했을 때, 선배는 미리 와서 자리에 앉아있었다.


평소처럼, 작은 잔에 나눠 담은 진한 에스프레소(Espresso Coffee)와 얼음잔 하나를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는 나에게 있어서 ‘에스프레소’는 뭔가 '전문가들의 영역'이라는 상징을 가진다.


그 쓴 커피를 작은 잔에 고밀도로 압축하여 마신다는 행동 자체가 뭔가 인생의 여러 굴곡을 지나고 뚫고 온 사람들의 이미지와 상당히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굴곡’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정도로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선배는 쓴 에스프레소 하나만을 주문하지 않고 ‘얼음잔’을 함께 시켰다는 점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쓴 것을 조금은 약하게 희석시켜주는 나름의 방법이 선배에게는 있다는 그런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아무쪼록 선배의 시선은 그렇게 창 밖을 조용히, 천천히 향하고 있었다.

'에스프레소와 얼음잔' 그리고 '얼음잔과 에스프레소', 무엇이 우선일까?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얼음을 넣는 것과 차가운 얼음 위에 에스프레소를 붓는 것, 그만큼의 차이를 가질까?


“선배, 일찍 왔네요? 제가 좀 많이 늦은 건 아니죠?"


“그레이 잘 왔어, 아 아니야 나도 방금 왔는데 뭘. 뭐 마실래?”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주문하고 올게요.”


“아냐, 그래도 내가 보자고 한 건데 사줘야지,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음, 그러면 사양하지 않고 저는 페어 진저(Pear Ginger)로 할게요. 선배, 잘 마실게요.”


“그럼 내가 주문하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라고 말하며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을 하러 갔다.


선배가 주문을 하러 간 사이에 가방과 외투를 정리하고 큼직하고 편한 느낌을 주는 의자에 앉았다.

아직 한 모금도 안 마신 선배의 커피 잔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열기가 가득한 그 잔의 위로 창 밖의 온도가 느껴졌다.


늦은 여름과 초 가을의 어느 가운데,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계절의 어중간함'에 과연 이렇다 하고 느껴질 만한 온도는 존재하고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어중간한 그런 생각을 나는 무심코 하고 있었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선배가 페어 진저 티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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