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살라와 리빙코랄 그리고 그 해 여름.

01-6 Marsala 18-1438

by 고봉수

“페어 진저(Pear Ginger)라는 티가 다 있었네? 맛은 모르겠지만 향은 되게 좋다. 자주 마시는 차야?”


“원래 얼 그레이(Earl Grey)를 가장 좋아하는데, 오늘은 왠지 그 '티(Tea)'를 마셔보고 싶었어요. 자주 마시지는 않아요.”


“그래? 하긴 미스터 그레이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대로 취향이 나름 확실하단 말이야.” 라고 말하며 선배는 미소를 지었다. 보기에 기분 좋은 미소였다.


“아까 오면서 보니까, 창 밖을 보고 있으시던데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색에 잠긴 콘셉트를 의도한 거라면 역시 안 어울려요 선배.”


“봤어? 아쉽네, 좀 더 처량한 콘셉트를 가진 여인으로 상상하면서 바라보고 있을걸.”


“지금이 더 잘 어울려요. 그나저나 정말, 선배랑 오랜만에 카페에 온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점심식사 이후에 남는 짧은 시간이나 아니면 업무 도중에도 무료함을 달래려고 선배와 커피 산책을 종종 가기도 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업무도 많아지고 해서 그 시간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들어 아쉽지만.


“그러니까, 진짜 요즘은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시간도 없다니까. 뭐만 하다 보면 금세 퇴근시간이야. 그레이도 그렇지?”


“저도 뭐 거의 그런 상태죠, 일이 많다는 게 뭔가 '나도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좋기도 하지만 가끔은 점심의 그런 산책이 그리워요.”


“맞아, 적당한 균형을 이루면서 일이랑 산책이 존재하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 라고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선배의 모습을 보니 어딘가 무거운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근황을 물어보거나 혹은 다른 곳을 보면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건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배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마 선배도 그런 어색함을 느꼈을 것이다. 대화의 중간중간 그런 느낌이 나에게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배의 그런 부담(그게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을 빨리 덜어주기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부른 이유를 물어봤다.

선배가 말한 적당한 균형 속에 나는 혹은 나와의 대화는 어디에 속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산책'에 속할 테지만, 그 시간은 선배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존재할까?


“근데, 선배 아까 무슨 말 할 게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뭐에요?” 라고 물어보며 선배의 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 그거 음… 이렇게 바로 물어보니까 좀 정리가 안되는데. 이왕 이렇게 물어봤으니 편하게 말할게.”


처음 보는 선배의 이런 모습에 나도 적잖이 당황을 했다. 어쩌면 ‘당황스러움’ 이라기보다는 뭔가 엄청난 것이 숨어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혹시 “선배가 나한테 고백 비슷한 것을 하려나?” 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닌 거란 사실은 선배의 표정을 보면서 정확하게 알았다. 그런 느낌이 그렇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고민스러운 걸까? 하는 또 다른 생각이 밀려왔다.


“뭔데 그래요 진짜, 갑자기 부담스럽게. 무슨 일 생긴 거는 아니죠? 일단 말해봐요 선배.”


“그레이, 어제 우리 팀에서 만난 클라이언트 알지? 그리고 그 그룹의 전략 컨설팅 부서도 기억나?”


“알아요. 이 업계에서 일하면서 그 그룹을 모른다고 하면 말이 안 되죠. 컨설팅 부서도 전부는 아니지만 몇 명은 기억이 나요. 근데 왜요?”


실제로 이 마켓(Market)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룹이기 때문에 그 그룹의 ‘존재’ 자체를 아느냐? 혹은 모르느냐? 를 물어보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한 선배의 고민이, 그리고 그 핵심이 너무나 궁금해졌다. 어디까지나 존재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이 것은 '존재' 안에 숨겨진 '무언가'를 묻기 위한 첫 단계로써의 질문이었다.


“개인적인 부탁을 받았어, 그 컨설팅 부서의 본부장님에게.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오랜 고민을 통해 하나하나 계산된 검토가 담긴 것만 같은 상당히 명확한 부탁을 하셨어.” 라고 선배는 말하며 나의 눈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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