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살라와 리빙코랄 그리고 그 해 여름.

01-8 Marsala 18-1438

by 고봉수

선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두 가지의 감정이 함께 공존했다.


첫 번째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가져다주는 '불편함'으로 우선 이 모든 내용들이 나 스스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업무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철저히 ‘개인적으로의 만남’이라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내가 하는 업무의 연장선으로 어떤 자문을 구하거나 혹은 지금의 프로젝트에서 추가적인 일이 더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런대로 공식적인 요청을 하면 되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떠한 목적과 사유로 인해 나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그 불편함이 계속 남았다.


두 번째로는 선배가 받은 그 부탁 (다시 이렇게 생각해보니 '부탁'이라기보다는 '지시'와도 같았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그런 지시랄까?) 거절하게 될 경우에 선배 그리고 선배의 팀이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어려움'이었다.

일단, 프로젝트의 성사는 물 건너갈 것이고 수주 실패에 대한 책임과 앞으로 그 그룹과의 모든 연결도 하나하나 끊어지거나 느슨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번 일을 가지고 업무상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평판(Reputation)을 가진 그룹이라고 아예 치부해버리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반응’이지 업계 전반에서 그 그룹이 미치는 ‘영향력’은 그 자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거절이 가지고 오는 그 결과가 선배에게는 혹은 우리 회사에게는 너무나 가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역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기분 나쁘다는 것은 알아, 그레이… 뭔가 '회사의 일'과 '너'를 교환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말이야. 그런 점에서는 이렇게 너의 의사를 물어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 (침묵)


“아까도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이건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생각이 들면 정말 편하게 이야기해줘.”


“음, 아니에요. 한 번 만나볼게요. 뭐 죽이기야 하겠어요? 아주 평범한 저한테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만나볼게요.” 라고 선배에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너무나 막연한 생각으로 무턱대고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정말 괜찮겠어? 혹시 모르니 나도 같이 간다고 말해볼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프로젝트에 관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네 알겠어요. 근데 만약에 그쪽에서 안된다고 하면 저 혼자 가도 괜찮아요. 대신, 이번 프로젝트 잘되면 맛있는 거 사요. 알았죠?”


“고마워, 그레이.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뭔가 너를 끌어들인 것 같아서… 그리고 이렇게 결정 아닌 결정을 하게 만들어서…” 라고 말하는 선배의 모습을 보니 그래도 아까 보다는 훨씬 그 부담이 가벼워진 것만 같아 보여서 기분은 좋았다.


‘누군가를 만나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면 되는 것 정도의 일’이 생긴 것뿐이다. 그 정도의 일이다. 그뿐이다.


선배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인사를 한 뒤에 밖으로 나왔다. 무슨 결정을 내린 것인지 아직도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그 정도만큼의 일’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차가 주차되어있는 사무실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 정도만큼의 일'은 어느 정도의 범위를 가질까? 혹은 어느 정도의 영역을 가질까? 내가 가진 나만의 영역을 침범하며 들어올지 아니면 나의 영역과는 고른 평행선을 그리며 흐를지.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하현의 달이 유독 차가워 보였다.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그 빛을 전달하는 달이지만 그 온도는 태양과는 다르게 차갑기만 하다.


이글거리는 차가움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앞선다. 그런 하현의 달 앞에 그리고 시리도록 차가운 그 빛 앞에 눈물이 새어 나왔다.


공기가 차가워서였을까? 아니면 그 빛이 눈에 들어와서였을까? 그런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중요한 메시지' 가 왔다.


“내일 오전 9시. 집 앞으로 운전기사를 보내겠음. 짙은 네이비 색의 세단. 단, 혼자 탈 것.”


간결하고 차가운 문자에 내일을 상상했다.


‘그 정도만큼의 일’을 해야만 하는 내일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정도만큼의 일’이 상징하는 것이 나에게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어떠한 흐름을 가지며 어딘가에 존재하는지를.


유난히 힘들었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들어갔다. 내일의 일은 내일로, 오늘의 일은 오늘로. 적당히 그 끝을 맺기를 희망하며 나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마음 한 편에 내일을 걱정하며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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