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살라와 리빙코랄 그리고 그 해 여름.

02-1 LivingCoral 16-1546

by 고봉수

점차 무거워져 가는 의식 속에 헤어진 여자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 친구의 얼굴이 아니라 완벽한 어울림을 가진 '그 속옷'이 뚜렷한 이미지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순간에, 왜 하필 이 흐름 속에 그 속옷이 생각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물로써 준비한 속옷은 여자 친구에게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간단하게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어디까지나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런 속옷을 일방적으로 준 것이니까' 라는 확신이 마음속에 깊게 남았다.


길을 걷다가 헤어진 여자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돼도 '내가 준 그 속옷이 잘 어울렸는지 혹은 아니었는지' 물어볼 필요가 이제는 없어져버렸다. 그뿐이다.


그동안 어딘가에 오래도록 남겨졌던 이 ‘상상’은 이제 구체적인 ‘현실’로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름의 분명한 ‘결과’를 가지며 내 안에 남겨졌다.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를 마음속에 남기는 순간 다시 정신이 들었다. 무거워져 가는 의식 속에 흩어져있던 파편들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낯선 느낌에 긴장도 되었지만 심장의 박동은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존재를 하나의 실체로써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숲의 흔들림은 느껴지지 않았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기분이 나쁘거나 위협을 받는 듯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의 의식은 무채색의 공간으로 흘러온 것일까?’ 그런 생각이 한참이 지나서야 뒤늦게 찾아왔다.

주변을 보니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같아 보였다. 손으로 잡히지 않는 바다의 경계를 보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이 곳은 그저 '아무런 색이 없는 무한한 공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나를 보는 것 외에는 볼 수 있는 게 존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초점에 잡힐 만한 것은 이 곳에 없었다.


점차 시력에 의존했던 감각이 원초의 목적에 반하여 느슨해지던 순간 뚜렷한 움직임이 보였다. 그 감각은 시각의 오류가 아니었다. 분명한, 하나의 확실한 움직임이 있었다.


방향도, 길이도 그리고 깊이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그 움직임이 보인(혹은 느껴진)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느슨해진 시각에만 의존한 채.


그곳에는 놀랍게도 ‘사각형의 면’이 있었다. 정신이 이상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눈에 보인 것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확실히 사각형의 면이었다. 입체를 가지지 않은 2차원적인 형태로써 산책을 하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사각형의 면은 이 공간과 같이 무채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몰라도 눈에는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다. 그리고 ‘산책’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와 같이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무한함을 표현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계를 가진 것과 아닌 것의 차이일까? 하지만 경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무한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너는 뭐지?” 라고 나는 사각형의 면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나는 사각형의 면과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음, 내가 보이나? 너에게 나는 어떻게 보이지?” 라고 사각형의 면은 분명하게 대답을 했다. 느슨해진 시각과 잃어버린 청각의 오류가 아닌 확실한 음성으로써 나에게 온전히 전달됐다.


“사각형의 면, 이곳과 분명한 경계를 가지는 그런 사각형의 면으로 보여. 나의 시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신기한 일이군, 아무튼 너의 눈에 내가 보인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한 거니까.”


“저기 근데, 아까 내 질문에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어. 그래서 너는 뭐지?”


“나는 그녀의 흰 공간에 있던 그 창문일 수도 있고 너와 헤어진 여자 친구의 그 속옷일 수도 있고 혹은 네가 타고 온 짙은 네이비 컬러의 반듯한 그 세단일지도 모르지. 나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상징'일 뿐이야.” 사각형의 면은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사각형의 면은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네가 가진 언어로 말하자면, 나는 리빙코랄(LivingCoral)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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