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4 Marsala 18-1438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달라졌다’는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그리고 어떻게 그 인사를 건네야 할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라이선스(License)를 가진 의사도 혹은 심리학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곧 그녀의 방에 도착을 했다. ‘무엇이 되었던, 그 시작이 어떻게 되었던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라고 다시 한번 마음을 먹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한 명의 ‘적격자’로서 이 곳에 온 것이니까.
그렇게 다짐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무거운 톤의 흰색과 아무런 소품이 없는 심플한 방이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숲을 통해서만 계절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색(Color)’으로써 그녀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얼굴은 생기가 느껴질 정도로 건강해 보이고 입고 있는 옷도 평범한 20대의 대학생들과 같이 꽤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시죠? 아빠한테는 전에 들었어요. 오늘 선생님이 오시니 대화를 좀 나눠보라고요.” 라며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내가 선생님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마도 딸에게는 어느 정도 적당한 거짓말을 하신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평범한 회사원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상대방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 네 맞아요.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어요. 부담은 전혀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부터 하면 좋을까요. 선생님? 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데에는 센스가 없거든요.”
“음, 괜찮으시다면 이 방에 대해서 좀 물어봐도 될까요? 정말 심플한 공간인 것 같아요.” 라고 대답을 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척 대답을 했으나 솔직히 말하면 갑작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무엇을 이야기할지 고민이 밀려오는 찰나, 적당한 소재로써 ‘공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요? 이 방에 대해서라… 선생님한테는 특이하게 느껴지나 보네요. 이 방이 어떻게 보여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전체적으로 무거운 톤의 흰색으로 그리고 눈에 들어올만한 소품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 특이했어요. 아마도 이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잘 안 느껴질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 입고 계신 옷의 '색채'와는 확연하게 다른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여기는 나름 '그 의도를 가진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이하신 분이네요. 재밌어요. 맞아요 여기는 나름의 그 의도를 가진 공간이에요. 하지만 제가 입은 옷의 색채와는 무관해요. 저는 이런 옷을 즐겨 입지 않거든요. 오늘은 그저 누군가와의 대화를 위한 '딱 그만큼의 옷'을 입은 거예요.”
딱 그만큼의 옷이라는 그녀의 말이 조금은 이상하게 다가왔다. 뭔가, 그녀 스스로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늘 자신을 찾아올 그 누군가에게 적당하고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아니죠? 의사나 그런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맞아요. 저는 의사나 혹은 그런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에요.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아무쪼록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요.”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방식'이고 적어도 그런 '동등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치료할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제가 그동안 수없이 만났던 선생님들과는 달랐어요. 말투도 표정도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그 분위기도요. 아무튼 미안해할 건 없어요.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은데, 근데 왜 오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겠지만 색채를 찾아드리려고 왔어요.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곤 그거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저 '딱 그만큼의 눈'을 가지고 여기에 왔어요.”
딱 그만큼의 옷을 입은 그녀와 딱 그만큼의 눈을 가진 나였다. 그리고 대화는 무거운 톤을 가진 공간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지 못한 채,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