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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Aug 14.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07 Greenery 15-0343

그저 A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혹은 오늘의 이 하루에 대한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 아무런 초점도 없이 무심코 걷고 있을 때 A가 뒤를 보았다. 그리고는 그 걸음을 갑자기 멈췄다.


정상적이라면 ('정상'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언가, 행동의 순서를 생각해보았을 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행동의 한 순서로 맞을 것 같은데 A는 정반대로 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날씨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선명한 녹색에 '정상'과 '어색함'의 경계는 그저 단어의 차이뿐이었다. A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던, 뒤를 돌아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던 그건 어디까지나 뒤에서 걸어가고 있는 내가 정해둔 순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A는 오랜 시간이 지나 말을 건넸다.


"이왕 이렇게 나왔으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 가지고 있던 뭔가가 사라졌으니, 이제 거기에 다른 무언가라도 채워야겠지? 안 그래? 심플해, 빈 공간에 다른 것을 채운다. 그것뿐이야."

         

빈 공간에 다른 것을 채우면 되는 일이다. 그것뿐이다. 매우 심플하다. 하지만 그 심플함에 많은 것이 누락이 되어있다. 그렇게 남겨진 빈 공간은 공허함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저기, 있잖아. 근데 음표에 대해서는 대체 어떻게 안거야?" 나는 A에게 솔직히 물어봤다. 그동안 유일한 취미이자 어쩌면 단 하나의 관심거리였던 클래식 음악이 사라졌고 그러고 나서 자연스럽게 달라진 지극히 개인적인 이 일상을 A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게 너무나 궁금했다.


A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적절한 대답을 고민하고 있을까?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제 어디로 갈지를 떠올리고 있을까? 그렇기엔 내 질문은 너무나 간결하고 짧았다.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음, 그 소음은 나한테서 온 거야. 그래서 알아, 나는."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 소름도 돋았던 것 같다. 나를 잠식하며 찾아온 그 소음이,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빼곡히 적어둔 음표를 사라지게 한 그 소음이 자기에게서 온 거라니... A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제대로 확인을 하고 싶었다. 이게 전부 무슨 이야기인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으니, A 너만은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해줬으면 했다.


"일단, 그걸 말해주기 전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아. 그건 그 후에 말해줄게."


"그게 아니라, 아니 중요한 일이면 뭔가 하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먼저 말해주면 안 될까?" 나는 A에게 한 번 더 부탁을 했다.


"아냐 아냐,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어. 그리고 그건 지금 해야 돼. 알겠지?" A는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면 내 질문보다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머리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리고 A는 나에게 말했다.


"자, 슬슬 갈까? 아까도 말했듯이 빈 공간에 다른 것을 채울 거야. 그래서 우리는 저걸 훔쳐야 돼. 내가 말했잖아, 심플한 일이라고."


이게 다 무슨 말인가? 다 떠나서, 또 뭘 훔친다니 대체 A가 뭘 하려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정말 단어 그대로 남이 가진 무언가를 훔치는 그 절도라면 나는 더 이상 A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의 연속일지라도 적어도 지켜야 할 그 선이 나에게는 있었다. 어찌 됐든, 훔치는 건 옳지 않다.


그리고 A는 분명 '저걸 훔쳐야 돼'라고 말을 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리고 그와 동시에 A의 시선을 따라간 그곳에는 허름한 공터가 있었다.


눈에 띌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공터였다. 정가운데는 뜨거운 여름 날씨에 풀도 다 죽었는지 황토색 흙만 보이는 아주 흔한 공터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훔쳐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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