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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May 30.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06 Greenery 15-0343

작은 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녹고 있던 얼음이 미세한 파열음을 내며 조각났다. 조각이 난 뒤에는 더욱더 빠르게 녹아내려갔다. 마지막 얼음 조각이 쪼개질 때, 그제야 나는 '사라진 음표'에 대해 생각을 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의문만이 나에게 남았다. 그건 조각이 나지도, 서서히 녹아내려가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오롯이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내 모습 어딘가에서 '부재'가 존재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A가 사라진 음표에 대해서 알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적잖이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A는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런 표정을 가지며 나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래, 일어날 거면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A는, 나 스스로 이 상황을 이해하기를 조금은 기다려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지막 얼음이 녹고 나서 나는 A를 따라 밖으로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은.


"알았어,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어디로 갈지는 알아야지, 밖은 꽤 덥잖아."


밖으로 나가겠다는 내 말에 A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건 정말,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음, 우선 나가자. 그게 시작이야."


서둘러 읽고 있던 책을 정리하고 남은 음료를 반납하고 나와 A는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구체적인 목적지 없이 한여름의 뜨거운 도로를 한없이 걸었다. 중간중간에 '사라진 음표는 어떻게 알았어?' 아니면 '대체 뭘 하려는 거야?'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고 싶었지만 뭔가 그러한 의문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 안에서 다 멈췄다. 멈추고 말았다.


함께 걷는 사이사이에 가끔 A가 콧노래를 부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는 소리 외에는 어떠한 대화도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나 특이한 혹은 기억을 할만한 큰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이 기억을 조금은 명확하게,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여름날의 날씨가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아스팔트를 녹이며 증기를 발생시키는 여름과 어울리게, 거대하고 높은 새하얀 구름이 파란색의 하늘을 채우고 있었고 그 중간중간을 선명한 녹색의 나무와 그 잎사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흩날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금세 이를 식혔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봐도 그 이후로 그런 기분 좋은 날씨는 다시 한번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한없이 걸을 수 있었던 여름이었다.


A의 콧노래에 맞춰 때로는 발걸음을 빠르게, 때로는 발걸음을 느리게 해서 걸었지만 따라가는 입장에서 나는 아무래도 A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A보다 앞에서 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A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며 그리고 중얼중얼 거리며 걷고 있었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속도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걸어오고 있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A는 그냥 카페 밖으로 나와서 걷기를 원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와 함께.


만약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아무 상관없었다. 그만큼 너무나 좋은 날씨였고 이마의 땀방울이 식으며 사라진 그 공간을 시원한 바람이 채워주었다. 그리고 파란색과 흰색 그리고 선명한 녹색이 적절한 비율로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더해서 적당한 소음으로 A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대로 기분은 좋았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오늘은, 고리타분한 하루가 될 뻔했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하루에 대해, 다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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