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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Aug 30.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08 Greenery 15-0343

나에게 생긴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훔쳐야 한다. 저걸 훔쳐야 된다. 아주 명료하고도 심플한 방식이다. 빈 공간이 생겼으니 이제 그 부분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을 거야.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훔친다는 건 아무래도 아니야."


나도 모르게 다소 격양된 목소리가 나왔다. 평소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런 불쾌한 혹은 불편한 감정이 가득히 쌓인 목소리가 나온다는 사실 그 자체가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어쩌면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는 아주 절제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무미건조한 음성, 좀처럼 날이 서지 않은 단어 등 적당한 범위에 수렴하고자 하는 그런 접근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웠다.  


'A는 어떻게 들었을까?'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하고 난 뒤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별게 아닐 수도 있는 거였는데, 기분 나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전제가 숨어있었다. 어찌 됐든, 나도 모르게 내뱉어진 목소리에 혹시 모를 그런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A는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웃기네, 누가 보면 아주 엄청난 도둑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뭐, 그렇게 안보일 수도 있지만 나도 범죄자가 되는 것은 싫다고. 그냥 하나의 비유라고 생각해, 훔친다는 게." 그리고 다시 덧붙여서 말을 했다.


"우리는 어떤 형태를 가진 것을 훔치는 게 아니야. 이해하기 쉽게 말을 하자면... 음... 잘 와닿을지는 모르겠는데 이건 저기서 일어났던 누군가의 시간을 가져오는 거야.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설명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은 묻지 말고 따라와."


A는 전과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점이 나에게 더 이상하게 다가오기는 했다.  


"다음에는 좀 정확하게 설명을 해줘, 나는 정말 뭔가를 훔치는 건 줄 알았어.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미안해."


나는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그 미안한 감정을 되도록이면 빨리 사라지게 하고 싶어서 바로 사과를 했다. 어디까지나 내가 가지고 있던 목소리의 불쾌함이 A에게까지 새어나갔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런 걸로 미안하다고 해, 세상에 미안해야 할 일은 더욱 많다고. 이런 시시한 것에도 매번 사과를 하다가는 돌아버리고 말 거야, 말 그대로 미치는 거지. 아무튼 우린 범죄자가 되는 게 아니야, 걱정 마."


그렇게, A는 내가 건넨 불쾌한 미안함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행이기도 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미안한 게 많을까?'라는 생각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이러다가 나는 돌아버릴지도 모르고 또 더 나아가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미안해야 할 일이 더욱더 많은데도.   


"자자, 서둘러. 저기 공터 보이지? 저기에 가야 돼. 너무 늦지 않게. 여기서도 보면 알겠지만 저기에는 훔칠게... 흠, 흙 정도? 밖에 없으니까 겁먹지 말고. 이제, 가자." A는 나를 재촉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싣고 공터를 항해 걸어갔다. 더 이상 A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걷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A를 앞서, 무작정 걸어가지도 않았다. 그저 A와 나란히 옆에서 걸어갔다.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낯설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향했다.


목적이 없이 향하는 것과 목적을 가지고 향하는 것의 차이가 분명하게 다가왔다. 공터에서 일어났던 누군가의 시간을 가지고 오기 위해, 단지 그 하나를 위해서 나는 힘을 주었다. 이제는 앞이 아닌, 내 옆을 함께 걷고 있는 A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공터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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