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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Jul 31. 2020

나만의 과업은 무엇인가?

<표백>을 읽고 (in 밀리의 서재)

*소설에 대한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관심이 생긴 이유>


1.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소설의 일부분을 봤는데 내용이 너무 공감되었음

2. 평소 소설을 잘 보지 않아서 독서모임을 통해서라도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음

3. 앞부분만 살짝 봤는데도 빨려들 듯이 끌어당기는 흡입력과 빠른 전개에 무조건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함



<이 책을 누구에게 추천하고 싶은가>


1. 남들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닌 나만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들

2. 대학생 또는 취준 중인 20-30대

3. <요즘 것들>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꼰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4. <90년생이 온다>를 재밌게 읽었거나 혹은 재미없게 읽은 사람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함



<가장 감명 깊었던 내용 3가지만 꼽아 보자면>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표백 / 장강명 저 / 한겨레출판(2011)>


내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봤던 소설의 일부분이 바로 이 내용이었다. 주인공인 <적그리스도>가 대학생 시절 대기업 취준에 성공한 선배를 향해 말한 것인데 이 장면이 바로 뚜렷한 비전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그저 <젊으니까 도전해라>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답을 몰라 헤매는 청춘들에게 <그렇게 도전 의식이 없어서 어디다 쓰냐>며 으름장을 놓는 사람들을 향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싶다.


적그리스도의 입을 빌려 말한 장강명 작가의 논리에 수긍했다. 나 역시 아직 사회에서 제대로 된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헤매는 <젊은 세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걸 보고 다시금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겐 <본보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가 전부가 아님을, 모든 것이 깨끗이 표백된 세대로 살아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보여줄 수 있는 선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물론 소설 속 인물 세연처럼 <자살>이라는 과격한 행동을 통해서만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돌이켜보면 모든 게 합리적인 결정이었지만, 너무 쉬운 길로만 걸어왔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껴. 독립운동가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자수성가한 사람 이야기만 들어도 부끄러워. 안전하게만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워."

<표백 / 장강명 저 / 한겨레출판(2011)>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한 번도 스스로 내리지 못했다는 소크라테스(휘영)는 안전하게만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나 역시 지금껏 의심하지 않고 남들이 가리키는 목표를 향해 무작정 달려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달리는 동안 스스로와 제대로 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부끄러웠다.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인식하기까지 약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부끄러운 시간들이 있었기에 남들이 정한 기준과 목표가 아닌 내가 정한 삶의 목표와 방향에 따라 달리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지도 알 수 있었다. 


수 십 년의 삽질과 수년간의 방황 끝에 찾은 나의 길을 지금처럼 하나씩 넓혀 나가보고 싶다.



나는 20대가 스스로 자신의 과업을 찾아주길 바란다. 내게 20대는 여러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일 뿐이다. 반면 젊은이들에게는 과업을 찾는 일이 바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길이다.

이 책에서도 인용한 새뮤얼 헌팅턴의 말처럼,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20대를 정의하는 각종 담론이 대체로 공허한 이유는 그 청년 세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과업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20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 인지도 모르겠다.

<표백 / 장강명 저 / 한겨레출판(2011)>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 시대의 부조리함과 불합리성에 대해 조목조목 밝히는 <세연>의 논리를 쉽사리 깰 수 없음에, 그러한 부당한 현실 속에 순응하며 살아온 나의 지난날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나만의 답을 찾아낸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실 소설을 읽는 동안은 이 불쾌하고 불편한 마음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잘 몰랐는데 작가의 말에 적혀있던 이 내용을 보고 나서야 그 원인을 찾아냈다.


장강명 작가는 지금의 20대에게 스스로 자신의 과업을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읽혔다. <20대 여. 당신만의 답은 무엇인가?> 



당신만의 답은 무엇인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작가는 독자인 내게 질문하고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별다른 제안도 제시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인생을 살아가 보고 싶은 청년들에게 네가 찾은 너만의 답이 무엇인지에 대해 작가는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그에 대한 답을 독자 스스로 내뱉게 만들기 위해 때로는 위로도 하고 때로는 윽박도 지르면서 남들의 기준이 아닌 너만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남들의 가르침이 아닌 너만의 깨달음으로 스스로의 답을 만들어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치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와 대화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하지만 그 싸움이 단순히 <싸움을 위한 싸움>으로도, <그런 정신머리로 뭘 하겠냐>는 비아냥처럼도 느껴지지 않았던 건 그러한 질문의 의도에 있었다.


장강명 작가는 헤매는 청춘을 다그치려고, 그들의 용기 없음을 비난하려고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청춘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앞날을 응원하기 위해 질문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서 이 소설을 다 읽은 나는 전에 없이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 순응하지 않고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 그리고 나에게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는 모습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자고 다짐하게 됐다.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는 지금 내가 판단할 수 없다. 단지 내가 할 수 거라곤 내가 믿고 있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것만이 나라는 한 사람이 아무런 희망도 별다른 제안도 제시해주지 않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게,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행여나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답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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