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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Mar 27. 2021

시대를 관통하는 소설에 있는 것

[독서노트] 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박완서. 이름만 들어도 경외감이 드는 이 대작가의 작품을 나는 여태껏 단 한 작품도 읽지 않았다.


원래부터 소설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즐겨 읽지 않을뿐더러 마흔 살의 나이에 등단하여 여든 살에 담낭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장장 사십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발표된 그의 작품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엄두가 안 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해부터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온라인 독서모임 Book두칠성 5기의 첫 번째 책으로 박완서 작가의 책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 선정되었다. 내가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읽어볼 기분 좋은 구실이 생긴 것이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가 등단 초기에 썼던 짧은 소설들을 엮어 낸 모음집이다. 그가 등단한 1970년대는 우리나라에 여럿 대기업들이 생겨나던 시기였고, 당시의 기업들은 앞 다투어 사보를 만들었는데 사보에는 기업 홍보와 함께 ‘콩트’라고 불리는 짧은 소설을 실었다고 한다.


콩트라는 장르를 이번에 처음 접해보는 거라 다른 콩트들과 비교할 수는 없고, 일반적인 단편 소설과 비교하자면 박완서 작가의 콩트는 정말 짧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중에서도 책의 초반에 실린 콩트들은 뭔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 같은 지점에서 돌연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그저 당황스럽다가 하나 둘 다른 콩트들을 읽어나갈수록 짧은 이야기 속에서 작가가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누가 봐도 일등 신랑감이지만 여자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없었던 남자가 드디어 가슴이 설레는 여자를 만났을 때의 그 느낌. 좋아하는 남자가 키가 작아 하이힐이 아닌 고무신을 신고 왔건만 같은 과 여자 동기들이 “이 아이는 남자 볼 때 오직 키만 본대요! 175cm 이상!”이라는 속 모르는 소리를 할 때의 복창 터지는 그 마음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 느껴보도록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더 이야기가 이어졌으면 하는 그 시점에 오히려 이야기를 끝냄으로써 이후의 일들을 독자 스스로 상상하면서 즐겨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소설에 문외한이지만 이제껏 읽었던 몇 안 되는 소설 중 인상 깊었던 것들은 모두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 재미들은 주로 ‘공감 가는 이야기’를 소설 속에서 발견했을 때 나타났다.


이번 책 역시 유독 재밌게 읽은 콩트들이 있는데 가장 기억 남는 콩트는 여성으로서 뚜렷한 직업관과 결혼관을 가진 ‘후남(後男)이’의 이야기였다.


직장을 갖고 일을 함으로써 가족들의 도움 없이 혼자 살 수 있게 된 삶의 보람과 기쁨은 물론, 사랑하는 남자와 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소망까지 모두 이루고 싶었던 후남이의 계획은 나 역시도 예전부터 바라고 그려왔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콩트 속 후남이는 안타깝게도 그토록 바라던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못한다. 사내연애를 통해 결혼을 한 후남이에게 회사가 내린 결정은 남편과 후남이의 전근이었다. 그것도 각자 꽤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1970년대는 그런 시대였지, 라는 말 한마디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넘길 수 없는 것은 50여 년이 지난 2021년 현재에도 후남이와 같은 상황을 겪는 사람들이 아주 없진 않으며 나 역시 후남이와 마찬가지로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잡진 못했기 때문이다.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완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에게 소설이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저리고 아프면서 끓어오를 때 써지는 것’이라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40여 년을 살아온 그가 써낸 소설에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부당함과 애환이 물 흐르듯 녹아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에 실린 모든 콩트가 전부 여성들의 마음만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박완서라는 소설가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내가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라는 책을 통해 만난 박완서 작가는 여성과 남성, 어린아이와 노인에 편파적인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모두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주며 그들의 삶과 애환을 공감 가는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있었다.


이 책에 가장 마지막에 실린 책 제목과 동명의 콩트인 <나의 아름다운 이웃> 속 주인공은 옆집에 사는 여자의 건강을 빈다.


자신의 손자가 결혼하는 걸 볼 때까지 살고 싶다는 스스로의 과욕을 줄여서라도 이웃집 여자가 부디 암을 완치하여 건강해지기를 진심을 다해 비는 주인공의 혼잣말에서 내 곁의 이웃을 생각하는 박완서 작가의 마음의 온기가 절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마흔 살이라는 나이에 등단하여 타계할 때까지 꾸준한 ‘현역’으로 살아온 소설가 박완서. 그가 만든 50년도 더 된 짧은 이야기 속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던 내 삶의 이야기가, 나 사느라 바빠 소홀히 했던 이웃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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