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생활 기록부
며칠 전부터 일본어 상용한자를 다시 보는 중이다. 올해로 5년째 일본에 살고 있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듣고 싶은 말 제대로 다 알아듣는 사람이 이제와 웬 상용한자?라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던 한자 공부를 올해야말로 완전히 끝내고 싶어 져서다.
“나도 딸이 모르는 한자 물어보면 잠깐 화장실 가는 척하고 핸드폰 사전으로 검색해서 알려주고 그래~”
몇 년 전 함께 일한 일본인 아주머니도 그렇게 말했고 지금껏 스쳐 지나가듯 만난 대부분의 일본인이 모두 ‘나 역시 모르는 한자가 많다’고 말했지만 원어민이 ‘모르는’ 한자의 수준과 내가 ‘모르는’ 한자의 수준은 결코 같지 않았다.
한 달 전 중고차 매장에서 차를 바꾸던 남편과 함께 본 계약서에서도, 그전에 새로 휴대폰을 개통할 때 읽어본 서류들에도 내가 모르는 한자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직원에게 이건 어떻게 읽는 거냐고 물으면 대부분 친절하게 알려주긴 했지만 일본에서 꽤 오랜 시간 살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 이상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일본에 오래 살 생각이 별로 없었다. 남편의 취업이 일본 회사로 결정됐기에 우선 일본에 왔던 것일 뿐, 기회가 된다면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등과 같은 다른 여러 국가에서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나 역시 일본어는 이 정도 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기초적인 한자는 읽을 줄 알고, 회화의 경우 웬만한 대화는 자유롭게 구사하는 마당에, 여기서 더 일본어 공부를 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이랬던 내 생각이 바뀌게 된 건 지금 내 뱃속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는 우리 아기 때문이다. 몇 달 뒤면 뱃속의 아기가 태어나고 그 아이는 아마도 일본에서 학교를 가고 직장생활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 가서도 “엄마는 외국인이라 이런 한자 잘 몰라”라고 말하고 싶지 않고 그 정도로 오래 일본에 산다면 말뿐만이 아닌 문자로 된 문서도 볼 일이 많아질 것이며(집을 산다든가 학교에서 주는 가정통신문 같은 거라든가) 나 역시 영주권을 취득한 뒤 집 근처 회사에 취직하여 다시 직장인의 삶을 살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한 마디로 일본은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 더 이상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좋든 싫든 꽤 오래 살아야 할 나라에서 그 나라의 문자와 말을 대충 알아듣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눈 뜨고 코 베이기 쉬운 해외 생활에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우리 몫을 챙기며 살고 있는 것은 지난 십 여 년간 공부해 온 일본어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나도 남편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얼마 전부터 수년 전에 한 번 훑어본 상용한자 책을 다시 공부 중이다. 작년 초 약 4개월간 다녔던 번역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 썼던 일한 번역 관련 책도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읽는다.
하루에 많게는 2시간, 적게는 30분 정도밖에 못 볼 때도 있지만 그 작은 시간들이 쌓이다 보면 결코 적지 않은 결과로 돌아올 것임을 나는 이미 안다.
얼마 전 진행한 육아회색지대 인터뷰에서 향다님은 나와의 인터뷰를 이렇게 정리했다. 스스로를 ‘저전력 모드’라고 칭하며 모든 일에 도전할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였던 내가 임신을 하고 예비엄마가 된 시점부터 뭔가를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생겨난 것 같다고.
중요한 건 그 에너지가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가 아닌, 내 아이를 잘 키워낼 ‘나’를 향하는 느낌이라던 향다님의 말씀에 나 역시 깊이 공감했다.
나는 나를 위해서 공부하고 글을 쓰고 주식투자를 하며 번역을 한다. 앞으로도 아내이자 엄마이며 스스로의 삶을 열심히 살아낼 나 자신을 위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내 시간과 노력을 투여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재기를 거쳐 다시 돌아온 일본 생활 기록부 입니다 :)
약 2주에 가까웠던 시간동안 제 삶에선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요, 그 모든 이야기는 일본 생활 기록부 시리즈를 통해 앞으로 차차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기다려주시고 늘 함께해주시는 구독자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