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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다 Mar 29. 2023

일단 해봐요.- 김연정

육아 회색 지대 인터뷰 집

김연정

#일본 거주, #임신 5개월 차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외 작가로 활동 중



연정님은 얼마 전까지도 출산을 고민하며 회색 지대에 서있었지만 이제 임신 5개월 차 예비 엄마가 되었다. 어떤 생각으로 회색 지대를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 이하 필자의 말은 파란색 글씨로 표기하였습니다.



- 인터뷰에 응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어요. 저 역시 참여자로서 이 인터뷰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면서 내가 처해진 상황에 대한 이해도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주로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현재 일본에 살고 있고, 올해 6월 말에 출산 예정인 임산부예요. 생계를 위해 주식으로 용돈 벌이 정도의 수익을 얻고 있고, 지난 2권의 책 출간 이후 작가로서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연재하기도 하고요. 최근에 번역가로서의 발걸음을 이제 막 떼기 시작했어요.  


- 육아하면 떠오르는 느낌이나 단어가 있을까요? 

 희생, 인내, 내려놓음 정도의 단어가 떠올라요. 주로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육아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않았어요. 행복하기보다는 고통스럽고 엄마의 희생이 전제로 깔린 모습들이 많이 있어서,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저 역시도 그 생각에 공감했죠. 나의 엄마나 내 주변의 출산한 사람들을 보면 아이를 낳고 일을 지속하는 사람보다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을 쉬는 친구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아이를 낳고도 계속 일을 할 수 있다 혹은 아이를 낳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식으로 긍정적인 사례가 된 삶이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추는 ‘나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명확한 결론보다는 ‘내가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를 수 있을까? 아이를 낳아도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 쪽으로 기울어 있었어요.

 


회색지대에 놓인 누군가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명확한 결론도 기꺼이 아이를 낳아 키워보겠다는 다짐도 내리지 못한다.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에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 세계에서 내가 잘 버텨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들 때문에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의 느낌을 그리고 부모의 길을 함께 걸어가 보자고 손 내밀어 온 배우자를 믿어 보기로 했다. 



-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이 어땠어요?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고 검진을 통해 아이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내가 아이를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앞서 생각해 왔던 내 안에 있는 출산이나 육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하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어요. 일련의 받아들임 그리고 내려놓음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해외 생활을 하며 얻은 삶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 이에요.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내가 덜 괴로워지거든요.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저는 당연히 회사를 다니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예상치 못한 비자 문제로 취업이라는 선택지가 아예 제외되었죠. 내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는 것은 선택지에서 빨리 제외시키고 그나마 해보고 싶은 것들을 추려서 시도하고 나와 맞는지 아닌지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아야 해요. 그리고 그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봐요.

아이를 낳지 않는 결정보다는 아이를 키우고 부모가 되는 경험을 해보기로 마음먹었고, 타지에서 아이를 돌볼 주체는 오로지 남편과 나 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육아 집중 기간이라고 불리는 3년, 그리고 엄마로서 기능하는 삶을 살게 될 시간이, 100세 시대라는 긴 인생에서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긴 인생의 시간에서 내가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지속해 나아갈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자 했죠. 


-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저의 일은 글쓰기, 주식투자, 번역 정도로 설명할 수 있어요. 

 우선 글쓰기는 취미이자 본업이에요. 일상에서 겪게 되는 소소한 일들과 생각들을 담아 몇 가지 주제로 플랫폼에 글을 연재하고 있어요. 더 나아가 그동안 냈던 두 권의 책이 수필 형식이었다면 앞으로는 장르를 바꿔 소설책을 내보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죠. 

글쓰기 만으로는 경제적 수익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아서 주식투자도 소액으로 하고 있어요. 큰돈은 아니지만 적게나마 수익을 낼 수 있고 다양한 경제 이슈와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돼요. 주식투자를 하면서 겪는 애환을 주제 삼아 글을 쓰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번역 일은 글쓰기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을 때 도전해 보았던 일이었어요. 해외 거주자로서 외국 책을 접할 기회가 많기도 하고 책을 쓰는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기에 쉽게 접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수강을 원했던 국내 최대 규모의 번역 아카데미는 오프라인 강의만 있었고 단계 별 전 과정을 수료해야만 번역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해외 거주자로서 오프라인 강의 수강은 어려워 포기 상태였는데 코로나 덕분에 입문반 수업이 100% 온라인으로 진행된다는 거예요. 그 이후의 과정이 오프라인이라 못 듣게 된다 하더라도 한번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었죠. 예상대로 입문반 수업 이후 모든 수업은 다시 오프라인 강의가 되어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이후 한동안 번역은 그저 그때의 수업으로 경험해 본 것이 전부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에 번역 대상 서적을 선정하기 위해 사전에 그 서적을 읽고 개괄적인 내용을 검토해 주는 번역 일을 맡게 되었어요. 전문적인 번역가가 하는 일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오히려 번역 입문자들에 대한 수요가 더 많은 영역의 일이더라고요. 검토서를 작성하는 경험들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전문적인 번역 일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 무언가 경제적인 수익을 내고자 혹은 당장에는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무언가 일이라고 불릴만한 어떤 활동을 계속해서 찾는 이유는 뭘까요?

먼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남들이 인정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데, 내가 나를 인정하려면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삶의 특정 역할들을 내려놓는 시기가 되었을 때에도 내 삶이 여전히 의미 있고 즐겁다고 느끼려면 엄마나 아내와 같이 관계를 통해 기능하는 역할이 아닌 나의 존재 자체로 의미를 찾고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60대가 되어도 금전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60대 이후의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해요. 모아 놓은 돈을 쓰는 것은 얼마가 모여 있든 소진하는 삶이잖아요.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지 모르는데 모아둔 돈을 계속해서 쓰는 불안한 삶 보다 꾸준히 수익을 내는 일이 필요해요.   


우리가 아이를 낳고도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동기는 인정 욕구에 있었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나의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관계를 통해 증명되는 삶이 아니라 나 자체로 빛날 수 있는 삶. 지금 당장 화려하게 빛나지 않더라도 희미한 불빛을 조금씩 더해가며 결국은 언젠가 반드시 환하게 될 그녀의 세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 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볼까요? 

 어떤 활동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 활동을 대하는 태도와 집중도가 달라져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중요한 일이 될 수 없죠. 최근에 한 플랫폼에서 유료 콘텐츠를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무료로만 글을 연재하던 시기에는 어차피 책이라는 특정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무료 봉사처럼 느껴지니까 글의 완성도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종종 넘기곤 했거든요. 그런데 내 글을 돈 주고 사주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대충 쓸 수 없다는 생각에 1주일 내내 주제를 고민하고 퇴고도 몇 번씩 하게 돼요. 전보다 훨씬 책임감을 가지고 글을 쓰게 되니 글의 퀄리티도 점점 높아지고 있고요. 그래봐야 글 한 편 당 100원 정도라서 내가 이 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거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이것을 내가 중요한 일로 규정하고 완전히 몰입하는 경험은 꼭 해봤으면 좋겠어요. 

 물론 내가 지금은 중요하고 본업으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한 그 일 자체도 언젠가는 ‘이게 아니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일단은 믿고 가보는 거예요.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고 무언가를 잠깐 해본다고 해서 의미 있는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뻔한 말 같지만 ‘일단 해봐야’돼요. 부딪혀 봐야, ‘아 이거다’ 싶기도 ‘아, 이건 아니다’ 싶기도 한 거니까요. 그리고 어떤 일은 결과를 얻기까지 시간이 걸려요. 한 동안은 지속해야만 해요. 그리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려면 그 일을 내가 좋아해야 해요. 그래야 결과가 나올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볼 수 있어요. 

 제가 선택한 일들은 적어도 5년, 10년은 지속할 각오가 되어있어요.  


- 내가 바라는 육아 하는 나의 모습이 있을까요? 

 어느 날부터 가까운 미래에 대해 먼저 상상하지 않으려고 해요. 내가 당장에 이런 성과가 나길 바랐는데 아니면 실망하게 되니까요. 당장 아이가 태어난 직후나 현실적으로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1,2년 뒤의 모습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영역의 것도 아니거니와 육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필수적인 의학 지식이나 상식적인 부분들 외에는 고려하지 않으려고 해요. 

다만 먼 훗날, 여자이자 엄마로서 내 모습을 보았을 때, 아이가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먼 미래의 모습을 바라고 있어요. 특히 아이의 절대적인 편이 되어주는 내가 되고 싶다. 범죄와 같은 악행을 저질렀을 때에는 물론 부모로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지만 살다 보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때 나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나에게 기댈 수 있게 든든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요.   


 ‘나는 잘될 수 있어’라는 무모한 자기 확신보다 ‘되든 안되든 일단 해보자’는 과감한 행동력 그리고 ‘가까운 미래를 너무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그 어떤 일이든 기꺼이 감내해 내 보겠다는 받아들임이 그녀가 회색 지대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선택한 전략이었다. 

 기꺼이 도전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아는 그녀라면 아이에게 언제나 자랑스러운 모험가일 것이고 당장의 성과보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지속하는 그녀이기에 아이가 자라나며 겪게 될 크고 작은 실패들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인터뷰를 마치고 난 소감이 어때요?

사실 삶을 살다 보면 나 스스로든 제삼자든 누군가 물어봐 주지 않으면 답하지 않으며 살게 되는 영역의 생각들이 있어요. 그동안 정리가 안된 채로 사는 기분이었는데 오늘 몇 가지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어 좋았어요. 중구난방으로 사는 요즘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요즘 뭐 해 먹냐’며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물어오는 그녀가 새삼스럽게 반가웠다. 임신 전 그녀는 스스로를 ‘저전력 모드’라고 말했던 때가 있었다. 무언가 해내고자 하는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임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는 그녀 안에 소중히 자리 잡은 생명의 기운으로 다시금 에너지를 채운 듯 보였다. ‘아이를 위해’ 에너지를 채웠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아이를 키워낼 스스로를 위해’ 에너지를 채웠다는 말로 풀어내고 싶다. 그녀가 각오한 희생정신의 무게가 가볍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전보다 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자신의 삶에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말이다.   

 출산을 망설이는 회색 지대에 있는 이들에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일단 해봐’다. 사실 임신과 출산은 100% 나의 의지 만으로 가능한 영역의 일이 아니기도 하다. 운이 좋게 임신이 되어 출산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면 이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 짓고 그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 성과가 날 때까지 지속하는 끈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 자체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어떤 존재에게는 반드시 흔들리지 않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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