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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다 May 23. 2023

질문하는 삶 - 함안댁

육아 회색 지대 인터뷰집

#사주팔자

#10살, 7살 딸 


 함안댁은 첫째 만삭 때까지 교육과 관련한 계약직 생활을 8년 정도 했다. 첫 아이를 출산한 이후 현실적인 조건의 한계로 얼마 동안은 금전적 수익을 얻는 경제활동이 없었지만 돈을 버는 것 이상으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 시간 동안 축적해 나아간 내면에 대한 탐구의 시간은 함안댁에게 일과 육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 진정한 나를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아이들과, 세상과 편안하게 연결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음을, 함안댁이 지나온 지난 10여 년의 삶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함안댁에게 일은 어떤 의미예요?

 저는 일이 ‘자신의 잣대로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죠. 누군가에게 그 잣대가 자본일 수도, 지식일 수도, 권력일 수도 있죠. 물론 제 삶의 풍성함은 돈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일을 한 번도 쉬었던 적이 없네요. 제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저의 잣대로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동안 어떤 잣대로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일을 해오셨나요?

 저는 제 존재에 대한 질문이 생긴 이래로 그것을 탐구하는 공부를 하는 동안 제 삶이 풍성해졌다고 생각해요. 저는 내면세계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나는 왜 이런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했던 것 같은데, 어떤 학문적 경계를 가지고 탐구를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시작은 심리학이었지만 최근에 동양고전, 인도 영성에 가장 깊은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동안은 인문, 사회, 종교, 소설, 해설이 담긴 철학서 등을 같은 맥락에서 찾아 읽었어요. 책 속에서 제 일상의 문제와 접속이 되는 지점을 만나면 책을 깊게 읽어낼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명리학과 주역 공부는 반려자로 생각하고 평생 함께 하려고 해요.



 함안댁은 한때 출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자신이 세속의 가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싫은 것도 아니고 아이가 밉지도 않은데, 온갖 욕망이 덕지덕지 붙은 채 속세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을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스스로에 대한 앎, 세상에 대한 앎으로 극복해 가고자 애썼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먼지 한 톨도 안 되는 티끌만 한 ‘나’의 존재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겠다는 자각이 그녀가 스스로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명리학과 주역이 우리가 흔히 아는 사주팔자인 거죠? 철학관이나 신당에서 봐주는?  

 그렇죠. 사실 명리학과 주역이라고 하면 사주팔자나 점괘로 미래를 맞추는 미신으로 치부하고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사실 제가 그런 것들을 오랫동안 관심 갖고 공부해 왔다고 드러내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학문이든 인간이 악하게 쓰는 거지 학문의 본질 자체는 악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쉽게 접하는 사주팔자인 명리학을 먼저 얘기해 보죠. 명리학이 주는 지혜 중 하나는 ‘나를 돌아보는 겸손함’ 이예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설명해 볼게요. 

 사주팔자는 일종의 바코드 또는 코드화된 암호라고 생각하면 돼요. 어떤 연유로 인해 내가 부여받은 삶인 거죠. 그래서 생긴 대로 살기 쉽고 대체로는 그렇게 살아가요.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나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해요. 내가 얼마나 거대한 자의식 속에 쌓여 있는 존재인지 묻고 알아가고, 원하지 않는다면 바꾸려고 노력해야 해요. 나 스스로를 깨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는 운명인 거죠. 또 어떤 개인이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훌륭하다 하더라도 살아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시절 혹은 영역이 분명 존재하잖아요. 이걸 운명에 굴복한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지금이 그런 때라는 것을 수긍하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오는 여유가 있음을 말해주고 싶어요. ‘기다림의 지혜”라고 생각해요.

 주역 역시도 단순히 점괘를 쳐서 뭘 맞춘다는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아요. 논리적이고 확실한 서양의 사유방식과는 달리 상징적이고 모호한 것에서 오는 지혜로움을 배워요. 일반적인 나의 의식과 상식이 아닌, 평소와는 다른 어떤 이야기가 주는 통찰이 있어요.  


 미신 혹은 비과학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해서 터부시 해왔던 것 같은데, 듣다 보니 그저 삶을 대하는 지혜로운 방법 중 하나로 다가오네요.

 우리가 샤머니즘이라고 얘기하는 영역도 하나의 문화이자 종교처럼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신이 가진 어떤 능력을 오롯이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쓰는 나쁜 사람도 있죠. 근데 뭐 무당만 그런가요? 어떤 분야든 바람직하지 않은 예시는 있을 수 있죠.

 현대의학에서는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려 하고 병증화 시켜버리는데 그저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정상성에서 멀어지고, 범주화되는 영역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아우르고 품어줄 수 있는 영역은 점점 줄어들어요. ADHD만 하더라도 예전 같으면 그저 부산스럽고 유별난 아이 정도였을텐데 지금은 약을 먹고 치료를 해야 하는 질병을 가진 아이가 됐어요. 정말 놓쳐선 안 되는 부분은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질문하고 반성할 수 있냐’ 는 거예요. ‘그냥 별난 애들 많아졌다.’로 끝내서는 안 돼요. 질문하고 깨닫고 애써야 끝내 변할 수 있는데, 기꺼이 질문하는 사람들은 사실 많지 않아요. 저는 보통의 평범한 대중이라서 지식인의 지성을 쫓아가지는 못해요. 중요한 것은 우리 같은 일반 대중이 스스로 무지함을 알아차리기 위한 자각을 해야 한다는 지점 같아요.  '내가 감히? 굳이 이런 공부들을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더라고요. 지성을 기반으로 한 사유의 시간이 삶에서 참 중요하고, 이를 위한 너무 좋은 책이라는 도구가 있잖아요. 어렵더라도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일상과 맞닿은 삶의 면면들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말하는 운명 그 자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운명이든 내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태도는 내가 결정 지을 수 있어야 한다. 특정 학문이, 거대한 자본주의 세계가, 미디어와 여론이 형성한 어떤 가치관이 있지는 않을지, 그것이 나의 진짜 욕망과 맞닿아 있는지, 그래서 나는 그것을 믿으며, 끝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핵심이다.



책을 읽더라도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힘은 잘 안 생기는 것 같아요. 실용서와 같은 책의 분류에 따른 한계도 있겠지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쉬운 말로 귀찮다 혹은 버겁다는 느낌이에요.

 맞아요. 나의 사유를 얻는 일은 생각보다 고단한 일이에요. 따지고 보면 ‘나의 사유’라고 착각하는 거지 온전히 때 묻지 않은 나만의 것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유일한 창조물은 없다고들 하잖아요. 어떤 지식인이 했던 말, 책에서 본 이야기, 미디어에서 만난 어떤 이들의 사연 등등, 지식과 경험의 축적에 기반해 내 것이 나오는 거니까요. 갑자기 번뜩이며 튀어나오는 아주 새로운 무언가는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질문을 찾아 묻고 답을 구하고자 애써야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이 생겨요. 내 마음 안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그 갈등의 근원, 본질을 잘 살펴봐야 해요. 왜냐하면 그 갈등을 푸는 힘,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나’ 거든요. 물론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에는 물리적 한계, 구조적 특성, 사회적 부조리함 등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풀어나가야 할 궁극적인 주체는 나예요. 내가 육아와 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일이 무엇인지, 육아는 어떤 모습인지’부터 정의해 봐야 해요. 금전적 수익을 얻는 내가 중요한 건지. 만약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금전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는지, 그 액수는 과연 타당한지 말이죠. 결국 나는 돈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끝내주게 자본을 쫓아보는 삶도 괜찮아요. 내 안에서 그런 삶에 대해 갈등하지 않을 수 있다면 덜 고통스럽게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거니까요. 쉬운 예로 명품백이 갖고 싶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가방을 통해 얻고자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봐요. 가방의 본질이 물건을 담아 이동하는 용도라면 천만 원짜리 명품백과 천 원짜리 에코백은 다를 바 없게 느껴져요. 에코백을 써도 되는 나라면 천만 원을 안 벌어도 되는 내가 되는 거죠.


육아의 영역에서 내 욕망에 대해 질문하는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세요.  

 육아는 자신에 대한 질문이 가장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아이한테 ‘엄마로서의 나는 이렇게 해야 된다.’라고 규정해 뒀던 모습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나의 아이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또는 이럴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다 틀렸었구나,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를 위한 육아 말고 아이를 위한 육아를 하려면 나를 내려놓고 비워야 해요. 그래야 온전히 아이로부터 배우고 사랑할 수 있어요. 아이가 주는 작은 신호를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고자 관심을 기울이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이의 우주는 얼마나 크고 넓은 지를 깨닫는 과정이 저에게는 사랑이었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과 중 하나는 아이들과 대화를 하는 일이에요. 친구들의 기분을 묻고, 정말 평범한 일상적인 수다를 나누죠. 다만 제가 무언가 교훈적인 것, 가치적인 것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건 경계하려고 해요. 그리고 세심하게 관찰해 봐요. 평소와 다를 게 없는지,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을 못 하는 건 아닌지, 주저하는 순간이 포착되면 어슬렁 가서 한번 물어봐요. 대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귀 기울여 들어주고 가려워 보이는 부분을 긁어줘요. 사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저는 지금과 같은 엄마가 아니었어요.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해야 하는 것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해 명확히 구분 지어 강하게 말하는 엄마였죠. 큰아이가 7살 때쯤 제가 깨달은 바가 있어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작고 어린아이가 그 사과를 온전히 받아주더라고요. 그때 그렇게 아이와 화해하는 시간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아마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어떤 이야기도 진심으로 나눌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종종 ‘좋은 엄마’ 프레임에 갇힌다. 내가 얼마나 헌신적인 모성을 가진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하고, 아이들을 위해 어떤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스스로 검열하고 다그친다. 그러나 그게 진정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헌신적인 모성을 가진 나,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엄마라는 이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는 나인지 나를 위해 당해내야만 하는 아이들인지 구분해 낼 수 없다면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는 육아의 진정한 목적 ‘독립’을 이룰 수 없다.



함안댁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미래상이 있다면요?   

 저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다 어른이 되어가는 공부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런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무엇이 어른의 모습이냐고 물으면 명확하게 정의 내리긴 어려울 것 같지만, 누군가가 힘들어하며 나를 찾아왔을 때, 온 힘을 다해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그 사람의 서사 안에서, 그에게 적절한 질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어른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해 줄 수 있는 사람이요.

 그리고 만약 제가 물질적으로 풍부하다면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어른 김장하> 아세요? 김장하 선생님의 이야기를 엮은 취재 기인데, 진주에서 한약방을 하시면서 평생 버신 돈을 사회를 위해 다 쓰신 분이에요. 김장하 선생님의 사연 자체도 굉장히 감동이지만 제가 인상 깊었던 장면은 다큐의 한 부분이었어요. 김장하 선생님의 장학지원 활동으로 배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한 수혜자분이 이제 이 한약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어르신을 찾아가 ‘죄송합니다. 당신께서 장학금을 주셔서 공부할 수 있었는데, 제가 훌륭한 사람은 못되었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분께서 ‘그런 생각하지 말아라, 이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해 가는 거다.’라고 하셨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해 가는 삶의 이치를 알고 계신 어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회를 위해 기꺼이 쓰실 수 있으셨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가 그분만큼 깊고 넓은 어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방향으로 서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삶을 위해 나의 정답이 아닌 그들 만의 답을 찾아가게끔 질문하며 돕는 삶, 함안댁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기 위해 공부해 온 그 시간이 그 누구보다 풍성한 삶을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기에 가능한 삶의 방향이었다. 4년 가까이 운영해 온 독서모임과 최근 시작하게 된 도서관 내 토론활동 지원사업은 그 방향을 증명하듯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뷰 소감이 있을까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꺼내 놓기 어려운 저의 생각들을 필터링 없이 얘기할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늘 한 번쯤 생각을 멈추고 걸러서 얘기해야만 했거든요. 제가 관심 있는 내면세계, 영성, 철학적 사유가 누구나 관심을 갖는 보편적인 분야도 아닐뿐더러 터부시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저의 말이나 생각으로 인해 특히나 아이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까 두려웠거든요. 인터뷰를 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대화를 나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게 얼마나 풍성한 대화예요. 우리 지금까지 ‘일’ 한 거예요.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학문들은 사실 ‘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내가 전공한 경영학도 ‘소비자는, 노동자는, 기업가(자본)는 무엇을 원하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왜 중요한지’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학문이 주는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정보 그 자체에 매몰되었다. 소비자를 이끄는 효과적인 마케팅방법,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적인 시스템과 같이 쉽고 빠르게 쓸 수 있는 것들만 수면 위로 드러난다.


사주팔자나 점도 그러했다. 우리는 대게 내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때와, 방법은 뭐가 있는지. 영험한 무당이 점지한 대로 또는 건네어준 부적으로 내가 화를 피하거나 복을 입을 수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이것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학문의 본질을 해치지 않고, 자신의 발달된 직관을 타인을 돕는 데 사용한다면 참 좋겠지만, 어떤 이들은 빈약한 지식적 기반 위에 자신의 욕망을 얹어 학문이라고 포장한 뒤 사람들의 욕심과 두려움을 이용하는데 그치고 만다.  나의 불안과 욕망에서 시작된 질문이라면 그에 대한 답 역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를 향해야 하는 질문이 타인을 향하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는다.


 함안댁이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육아 회색 지대에서 일과 육아를 방황하는 이들 역시도 내 안에서 타인의 욕망으로 점철된 부분은 없는지,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던 가치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 이어온 육아회색지대 인터뷰를 통해 나를 향한 수많은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며 오늘의 인터뷰를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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