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붱 Jun 13. 2024

민폐 좀 끼치고 살겠습니다

6월 13일 모닝 페이지

지난주 주말 아침. 아마존에서 주문한 물건이 배달완료 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아파트 1층에 있는 공동 무인 택배함으로.


이번에 주문한 건 새벽 4시부터 8시 사이에 배송이 되는 새벽 배송 상품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른 시간이다 보니 새벽 배송 상품의 경우 거의 무인 택배함에 넣어두고 가는 듯했다.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무인 택배함을 이용하여 새벽 배송 상품을 잘 수령해 왔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바로 우리 집 인터폰 화면에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1층 로비에 있는 무인 택배함으로 내려가봤다. 그런데 택배함 터치 패널에는 우리 집 호수가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502호에만 2개의 택배가 온 걸로 표시되어 있을 뿐.


그걸 본 순간 알았다. 택배 기사가 택배함에 물건을 넣을 때 집 호수를 잘못 입력했다는 것을.


내가 사는 아파트는 무인 택배함에서 물건을 수령할 때 각 호수별로 지정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한다. 고로 502호로 잘못 입력된 우리 집 택배를 찾기 위해서는 502호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는 소리.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처음엔 아마존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택배가 잘못 배달되었으니 해결해 달라고. 그러자 전액 환불해 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처음엔 황당했으나 곧 수긍이 갔다. 택배 기사를 다시 우리 집으로 보내서 문제를 처리하는 비용보다 차라리 물건값을 전액 환불해주고 마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502호에 찾아가서 택배함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것.


주말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택배 좀 꺼내달라고 얘기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주말엔 경비원조차 근무하지 않고 관리회사도 휴무이기 때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자기야. 나랑 택배 찾으러 502호 가자."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냥 좀 있어보자. 그 사람들이 가져와줄 수도 있는 거잖아."


"자긴 왜 좋은 쪽으로만 생각해? 막말로 그 사람들이 둘 다 자기네 집 거였다고 그러면 어떡할 거야?"


"그땐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환불도 받았다며."


그렇게 태평하게 말하는 남편이 순간 조금 얄미웠지만 맞는 말이라 달리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물건 값은 환불받기로 한 상황. 502호에서 택배를 가져다주면 좋은 거고 가져다주지 않더라도 우리 집이 입을 금전적인 손해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남의 선의를 믿고 그저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이 불편했고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것 역시 조금 주저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좀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순간의 어색함과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감당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좀 손해를 보고 마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보다 더 불편하고 어려운 일은 타인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502호 사람들이 진짜로 우리 집에 택배를 가져다준 것이다.


늦은 밤, 인상 좋아 보이는 중년 부부가 상체가 다 가려질 만큼 커다란 택배 박스를 들고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하루종일 그들을 의심하고 안 좋게 생각한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먹을 거라도 좀 드려야 하나? 아니면 하다못해 감사하다는 내용의 손편지라도 써서 우편함에 몰래 넣어둘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곧 멈췄다. 이 또한 마음의 빚을 지고 싶지 않다는 심리적 방어 기제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나 또한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손해를 보고 싶지 않으니 나 역시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행동을 진정한 '선의'를 가진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텐데도.


누군가의 친절에 보답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내게 도움을 준 이들에게 무언가 물질적인 보상을 하기보다는 언젠가 나 역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 일일 지도 모른다.


서로 간의 부탁과 도움이 전혀 없는 건조한 사회보다는 크든 작든 서로가 작은 민폐를 끼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사회가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니까.


그렇게 서로를 향한 친절이 돌고 돌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보다 더 좋은 쪽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나는 오늘의 감사함을 마음속 깊이 기억해 두기로 했다. 누군가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의외로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