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레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미정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문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2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 자리는 방금 정체를 알 수 없는 '특별한 손님'이 물을 뚝뚝 흘리며 앉아 있던 곳이었기에 대성이 다급히 손님 곁으로 다가갔지만 어쩐 일인지 좀 전까지 그렇게 물로 흥건하던 바닥도, 의자도 모두 뽀송하게 말라있었다.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바닥을 훑어보는 대성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미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 긴 메뉴가 따로 없나 봐요...?"
"아..! 네. 저희는 단일 메뉴만 판매하고 있어서요. 메뉴가 따로 없습니다!"
"뭘.... 파시죠?"
"라멘을 팝니다!"
"아...... 라멘...."
그렇게 대꾸하는 미정의 눈가에 실망감이 역력히 드러났다. 라면이라니. 모유수유 중인 자신은 절대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미정은 모처럼만의 야식에 잔뜩 부풀어있던 가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시식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앉아있던 테이블 의자를 뒤로 드르륵 밀며 일어서는 미정의 어깨가 한껏 처져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모유 수유 중이라 먹는 걸 좀 많이 가려서요.... 라멘은 좀.... 어려울 것 같네요.."
한창 영업하는 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손님이라니.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미정은 도저히 라멘은 먹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임신 전부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서 최대한 담백하고 덜 기름진 음식으로만 챙겨 먹어왔던 미정이기에 기름끼가 가득한 진한 육수와 기름에 튀긴 면발로 이루어진 라멘은 미정으로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다시 한번 작게 고개를 숙이며 몸을 돌려 가게를 빠져나가려는 미정의 뒤로 낮지만 분명한 남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수유 중에도 드실 수 있는 라멘이 있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요?"
"물론이죠. 손님께서만 괜찮으시면 제가 한 번 만들어드리고 싶은데...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귀밑까지 오는 미정의 단발머리가 어디에서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에 살짝 흩날렸다. 미정은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 넘기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자리에 앉는 미정의 앞으로 갈색의 영롱한 색깔의 물이 반 정도 찬 컵 하나가 놓였다.
"루이보스 차예요. 기다리시는 동안 드시고 계세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미정 앞에 내려놓은 미와상은 자기가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멀뚱히 서있는 대성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총총 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쳐다보던 미정은 눈앞에 놓인 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루이보스차라니. 일반적으로 이런 음식점에서 내올만한 차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대접받는 기분에 미정은 한껏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모유양을 늘리기 위해서는 수분 섭취를 많이 해야 하는데 맹물만 먹기는 너무 질릴 때 가끔 우려서 먹곤 했던 것이 바로 루이보스차였다. 카페인도 없고 루이보스 특유의 그 구수하지만 향긋한 향이 왠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 같아서 즐겨마셨다.
그런 자신의 사정을 이 가게 사람들이 당연히 알 리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미정은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차를 내어준 이 가게가 어쩐지 너무 고마웠다. 오늘같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심신이 벼랑 끝에 몰려있을 때 겨우겨우 찾아온 하나의 행운 같은 기분이랄까?
'... 차 한 잔에 내가 너무 오버하나...'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줄곧 아래로 향해있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는 것을 미정은 굳이 막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떤 라멘을 만들어 주시려나...?'
"띠리리리리리-"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장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던 미정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커다란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미정은 눈살이 확 찌푸려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남편]
이걸로 거의 열 통 째였다. 남편으로부터 온 전화가. 미정이 집에서 나온 지 겨우 3시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그 사이 남편은 미정에게 거의 10분에서 20분에 한 번씩은 전화를 해왔다.
아마 지금 시간이면 아기의 다음 수유텀이 왔을 것이다. 그래서 분유라도 먹여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신에게 전화를 한 것이라는 짐작은 갔지만 미정은 끝내 남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3시간 전, 남편이 자신에게 한 '집구석에서 남편이 가져다주는 돈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주제'인 자신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조금이나마 남편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연아.... 엄마가 미안...'
아기에겐 미안했지만 그때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물론 자신의 아이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는 것을 미정은 모르지 않았다.
"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는 3시간 전의 상황이 다시 미정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