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시간째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미정은 뻑뻑해져 오는 눈을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졌다.
평소 자주 이용중인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서 어제부터 이번 주 주말까지 이어지는 단 3일간의 빅 세일 기간에 미정은 큰맘 먹고 식기 세척기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고민하고 있던 모델 3개를 두고 어떤 걸 살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봤지만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아 이틀째 끙끙거리고 있는 것이다. 미정이 고민하고 있는 모델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30만 원대의 중국산 6인용 식기 세척기. 용량이 크고 가격이 저렴하지만 자동 급수 기능이 없어서 사용할 때마다 매번 물탱크에 물을 채워줘야 하고 단층 구조라 공간 활용면에서 조금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60만 원대의 중국산 6인용 식기 세척기. 용량도 넉넉하고 자동 급수 기능도 있어서 물보충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현재 고려 중인 모델 중에 가로 폭이 가장 넓어서 부엌에서 자리 차지를 많이 할 것 같다는 점과 작동음이 생각보다 커서 행여나 아기의 잠을 방해할까 싶어 구매가 망설여진다.
세 번째는 100만 원대의 한국산 6인용 식기 세척기. 용량이 큰데 자동급수 기능이 있고 사이즈 역시 가장 작으며 심지어 소음도 제일 적었다. 디자인도 가로폭이 좁고 세로폭이 긴 2층 구조로 공간 활용면에서도 가장 만족스러웠다. 다만 딱 한 가지. 미정이 이 모델을 선뜻 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가격이었다.
남편이 말한 식기 세척기 예산은 50만 원까지였다. 그 안에서 적당한 걸 골라 사는 것을 조건으로 미정의 남편은 식기 세척기를 사달라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놈의 돈이 웬수지.....'
이번에도 문제는 그놈의 돈이었다. 미정의 직업은 전업주부였다. 원래는 미정도 직장을 다녔지만 몇 년간의 시도 끝에 어렵게 얻은 아기가 혹시나 잘못될까 싶어 임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웠다.
그렇게 애지중지 뱃속에서 키워낸 딸이 건강히 태어난 게 바로 두 달 전이었다. 고대하던 아기가 태어났으니 처음엔 그저 너무 신기하고 기쁘기만 했지만 그 벅찬 감정이 사라지는 데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날부터 지금까지 아기는 2시간 이상을 자주지 않았다. 모유를 먹여서 배가 금방 고파지는 건가 싶어서 중간에 한 3일 정도 분유만 먹여봤는데 분유를 먹여도 똑같이 2시간마다 깨서 우는 아기를 보며 미정은 분유 수유를 단념하고 다시 모유 수유로 돌아왔다.
2시간에 한 번. 어떨 때는 1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 미정은 근 두 달간 제대로 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이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육아휴직을 쓸 수 없는 남편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아니, 새벽시간까지 포함하면 거의 하루 24시간을 겨우겨우 쪽잠을 자가며 아기에게 젖을 물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활이 두 달씩이나 이어지니 집안일은 물론 샤워를 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미정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수진 씨는 잠을 좀 자? 우리 애는 2시간마다 깨서 난 거의 못 자..."
[미정 씨. 집에 이모님들은 다 있는 거지?]
"이모님들? 그게 뭐야?"
[자기 몰라? 요즘은 건조기, 로봇 청소기, 식기 세척기를 3대 이모님들이라고 부르잖아. 나도 그분들 없었으면 자기처럼 잠 한숨 마음껏 못 자고 좀비처럼 생활했을걸?]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조리원 동기 수진의 말에 미정은 솔깃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건조기와 로봇 청소기는 이미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한 분의 이모님인 식기 세척기를 들이면 지금의 이 최악의 상황을 조금은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이 미정의 가슴속에서 작게 피어올랐다.
그 후로 미정은 장장 한 달간 여러 제품들을 비교 분석하며 최종적으로 총 3가지의 모델로 선택지를 좁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고 싶은 건 제일 비싸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100만 원대의 한국산 제품이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가뜩이나 애기 기저귀다 분유값이다 들어가는 고정비가 한 두가지가 아닌데 달달이 버는 돈도 없는 자신이 이런 고가의 제품을 턱턱 살 수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남편에게 100만원대 제품을 사도 되냐고 물어본 미정에게 돌아오는 남편의 대답은 그저 단호하기만 했다.
"그냥 제일 싼 거로 사. 어차피 식세기 기능이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뭐 그렇게 비싼 걸 사려고 해?"
남편의 말에 미정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은 오피스룩으로 마트에서 파는 19,900원짜리 카라티 3장만 마치 교복처럼 주구장창 돌려 입을 정도로 엄청난 짠돌이였다.
'내가 아직 돈을 벌고 있었다면 그냥 샀을 텐데.....'
미정은 답답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기를 갖고 출산을 한 지 두 달 째인 지금까지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정은 자신이 바라는 선택보다는 주로 아기나 남편을 위한 선택을 해왔다.
임신 중에는 뱃속의 태아에게 행여나 안 좋은 영향이 갈까 싶어 그렇게 좋아하던 매운 음식도, 매일 아침 빠짐없이 하던 조깅도 때 되면 꼬박꼬박 해왔던 염색도 그만뒀고 출산 후 지금까지는 모유의 양이 줄거나 질이 떨어지지 않도록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미역국을 하루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진 미정은 이번에도 그런 거라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우리 형편에 100만 원짜리 식기 세척기는 너무 오버하는 거라고. 30만 원짜리도 많이들 쓴다고 하지 않냐고. 일단 제일 저렴한 걸로 사서 먼저 써보고 고장 나면 그때 다시 다른 걸 사봐도 괜찮지 않겠냐고.
'그런데.... 고장 나면 남편이 새로 사주긴 하려나....?'
"으아아아아앙~~"
문득 든 생각에 미처 답을 찾을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우렁차게 우는 아기에게 미정은 후다닥 달려가면서도 급 짜증이 치솟았다. 오늘 밤 애기 재우기 당번은 남편이었다. 내일이면 끝나는 세일 기간 중에 식기 세척기를 결제하려면 오늘 중에는 뭘 살지 결정해야 했기에 오늘 밤만 애기 좀 봐달라고 부탁을 했던 터였다. 그런데 애가 숨넘어갈 듯 우는데도 남편의 목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이 인간은 애 우는데 뭘 하고 있는 거야????'
벌컥, 열린 문 사이로 침대 위에서 자지러질 듯 울고 있는 아기와 그 옆 소파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자 미정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었다.
"자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애 울잖아!!!"
샤우팅 하듯 터져 나온 미정의 말에도 남편의 눈꺼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정은 아예 남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부스스 눈을 뜨는 남편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번 쩍, 하더니 인상을 팍 찡그리며 미정에게 말했다.
"아 좀...!! 나는 잘 재웠다고...!! 애가 깨서 우는 걸 나보고 뭐 어쩌라고!"
"재우기만 하면 끝이야?? 일어나면 좀 안고 달래주기라도 해야지!"
"애가 배고파서 우는데 내가 뭐 할 수 있는 게 있어? 없는 젖이라도 물려?? 그니까 그냥 제일 싼 거로 빨리 결제하고 와서 당신이 애 좀 보면 얼마나 좋아???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온 내가 집에 와서도 쉬지도 못하고 애까지 봐야 해?!!"
"으아아아아아앙~~!!!"
양보 없이 목청껏 싸우는 미정과 남편의 목소리를 덮을 정도로 더 커다래진 아기의 울음소리에 미정은 일단 남편에게 대꾸하는 것은 뒤로하고 자지러질 듯 울고 있는 아기를 번쩍 들어 안았다.
"어휴!! 이놈의 집구석!!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다 진짜!!!"
쾅! 문을 닫으며 거실로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과 함께 미정의 마음 역시 쾅! 닫혔다. 내가 저런 인간을 믿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일까지 관두고 이러고 살고 있다니.
애는 같이 낳아놓고 자기 혼자 이렇게 운동이며 먹는 거며 꾸미는 거며 모든 걸 다 포기한 채 살아가는 미정은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엄마의 삶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요즘 사람들이 결혼해도 애를 안 낳고 딩크로 살겠다고 하는 게 납득이 간다고 미정은 생각했다.
"꿀꺽꿀꺽"
배가 고팠는지 미정의 품에 안겨 정신없이 젖을 먹는 아기를 내려다보던 미정은 문득 벽에 걸려있는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언제 빗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부스스해진 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한 중년의 여성이 비치고 있었다.
결혼을 늦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정은 30대 후반이었다. 그럼에도 40대 중반은 훨씬 넘어 보이는 그 모습에 미정은 조용히 절망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정말 이것밖에 없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애는 대체 언제 크는 거야?? 그동안 나는 계속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되는 걸까? 그런 삶을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쭉쭉 젖을 빠는 아기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미정은 끝내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