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환상의 라멘가게-4

by 코붱


"펴... 평생이요?!!"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대성을 향해 남자는 벽에 걸려있던 여분의 앞치마를 건네며 말했다.

"평일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네...??"

무턱대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대성은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채 입을 열었다.

"3개월 간 여기서 일해. 그럼 라멘 값은 까줄게."

대성은 그렇게 비싼 라멘이 어디에 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자신 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의 고압적인 눈빛에 주눅이 들어 찍소리 한 번 하지 못한 채 남자가 건네주는 앞치마를 순순히 건네받았다. 그러다 문득 남자의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대성이 살짝 남자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까는 평생 일해도 모자라다고 하지 않으셨나... 요...?"

그렇게 말하는 대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농담."

그게 벌써 한 달 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좀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유였지만 어찌 됐건 대성은 지금의 아르바이트를 이어오고 있다. 어차피 회사도 짤린 마당에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다시 취직 준비를 할 의지도, 기력도 없던 대성이었다. 3개월 동안 이곳에서 일하며 머리 좀 식히자. 대성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대성이 라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사였다. 지금 사는 집은 순전히 전 직장을 위해서 골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이 집구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저놈의 간판 조명만 안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다는 생각을 전 직장을 다니던 2년 내내 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사하는 것이 대성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부터 하고 싶다고 생각만 했지만 결코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을 드디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셈이었다.

처음 왔다고 생각한 라면 가게가 있는 동네는 알고 보니 자신의 자취방이 있던 동네에서 지하철 역으로 2 정거정만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대성은 처음엔 좀 놀랐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되었다. 근 2년 간 회사-집, 회사-집만 반복하는 생활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든 것이다.

이번에 이사한 집은 전에 살던 집과 동일하게 원룸이긴 했지만 방과 부엌 사이에 높은 책장이 있어서 공간에 대한 구분이 확실하다는 점과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휘황찬란한 간판이 줄지어 빛을 내고 있는 어지러운 광경이 아니라 오피스텔 단지 내에 작게 조성한 공원이 한눈에 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계약했다. 무엇보다도 한 달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라면가게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하다는 점 역시 무시하지 못했다.

대성은 집과 직장의 거리는 무조건 가까운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도 그럴게 지금까지 일해온 직장들은 대개 밤늦게까지 야근이 이어지는 게 당연한 곳이거나 야간 영업을 하는 고깃집 같은 곳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대중교통이 끊겨도 걸어서 집에 갈 수 있을 거리에 집을 구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다 보니 어느새 라면 가게 앞에 도착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가자 '딸랑', 하며 문 끝에 달아둔 풍경에서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대성 군!"

습관처럼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주방 안에서 이제 막 도착한 식재료 상자를 열어보고 있던 미와상이 활짝 웃으며 대성을 맞이해 줬다.

머리 위에 뒤집어쓴 빨간색 빵모자 같은 위생모자는 미와상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이 주방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미와상의 굳은 의지가 담긴 것이기도 했다. 분명 저 빵모자 안에는 흰색의 촘촘한 머리망까지 잘 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중 삼중으로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있으면 너무 답답하고 때로는 더워서 얼굴 위로 땀이 주룩주룩 날 때도 있지만 주방에 들어간 자의 숙명 같은 거라며 씩 웃던 미와상의 주름진 눈가엔 한 톨의 불만도 묻어나지 않았다.

미와상은 대성이 라멘 가게에서 일하기 전부터 이곳에서 주방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미와상은 일본 오사카 출신의 토종 일본인이지만 30년 전 한국인 남자와 결혼 후 함께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듣기로는 사장이 푸드트럭으로 혼자 전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때부터 함께했다고 하니 사장과는 인연이 매우 깊을 것이라고 대성은 혼자 지레짐작했다.

"대성 군! 마침 잘 왔어. 여기 있는 박스에서 재료들 좀 꺼내서 냉장고에 넣어줄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대성은 미와상의 말에 후다닥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있던 양파며 당근 같은 재료들을 꺼내 차곡차곡 냉장고 속에 정리했다. 그리고 나선 곧바로 설거지 거리가 수북이 쌓인 설거지통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라면 가게는 원래 영업 자체는 저녁 6시부터 시작하는데 밤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브레이크 타임을 가졌다. 대성의 일은 보통 브레이크 타임이 시작할 때 출근하여 그전까지 영업하며 나온 설거지거리를 해치우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의 허리에서부터 무릎까지 올 정도로 깊고 넓은 사각형의 싱크대 안에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감이 안 올 정도의 엄청난 양의 식기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마 주방에서 일을 안 해 본 초보자들에겐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릴 정도의 양이겠지만 대성에겐 이깟 것쯤 땅 짚고 헤엄치기요, 누워서 떡먹기였다. 고깃집에서 일했을 땐 이보다 더 많고 다양하고 심지어 무거운 식기류를 다루었기에 이런 것쯤은 사실 대성에겐 일도 아니었다.

대성은 머리에 쓴 빨간색 모자를 한 번 푹 눌러쓰고 싱크대 옆에 걸려있던 고무장갑을 착 손에 낀 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벅벅 그릇들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게 쌓여있던 식기들이 깨끗한 거품 목욕을 하며 싱크대 옆 식기세척기 안으로 착착착 자리를 잡아갔다.

순식간에 설거지 거리를 해치운 대성은 이번엔 홀로 나가 바닥을 대걸레로 벅벅 닦고 카운터 바와 테이블 위에 부족해진 젓가락과 숟가락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으로 카운터 바와 테이블 위로 걸레로 닦은 대성의 뒤로 얼른 와서 밥 먹으라는 미와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먹겠습니다..!"

대성은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에 짧게 군침을 삼켰다. 이곳은 늘 브레이크 타임에 이렇게 밥을 줬다. 가끔은 가게에서 파는 라멘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보통 그날그날 남은 재료들을 조합하여 볶음밥이며 국밥 같은 간단한 요리들을 미와상이 차려주었다.

대성은 집에 있을 땐 거의 찬밥에 물 말아서 김치하고만 먹거나 단백질 셰이크에 삶은 계란 정도만 삶아서 먹는 일이 많기에 이렇게 제대로 된 밥상을 받는 것이 못내 기뻤다.

오늘의 메뉴는 돼지고기와 야채를 잘게 썰어 넣은 볶음밥과 계란국이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끼니를 먹지 못한 대성으로선 이것만으로도 그저 진수성찬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대성 군..!"

볶음밥을 허겁지겁 입 안에 욱여넣고 있던 대성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 물을 건네주는 미와상에게 눈짓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때 사장이 대성의 맞은편 의자를 드르륵 꺼내 앉았다.

"아니, 그 정도 스피드로 먹어.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올 것 같으니까."

"...? 예... 그게 무은....."

볶음밥으로 가득 찬 입 때문에 발음이 뭉개지듯 나온 대성은 순간 부끄러웠지만 이어지는 사장의 말에 숨을 흡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만월(滿月)이거든."

사장의 말에 대성은 그가 이곳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퇴근하려던 자신을 불러 세워서 하던 사장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라멘집의 근무 규칙은 딱 2가지가 있어."

"뭔데요?"

"첫째. 어떤 손님이 와도 놀라지 않는다."

'그건 뭐.. 당연한 거 아닌가. 이상한 사람이라도 들어오나? 왜 그런 말을 하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성은 잠자코 이어지는 사장의 말을 기다렸다.

"둘째. 첫 번째 규칙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게 뭐예요....."

말장난도 아니고. 뒤이어 나오려던 말은 사장의 건조한 눈빛 앞에 대성의 목구멍 안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하지만 대성은 며칠 뒤 금방 알 수 있었다.

사장의 의미 모를 말이 결코 말장난 같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3화환상의 라멘가게-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