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원래 대성에게 최고의 날이 되어 주었어야 했다. 2년간 계약직으로 근무했던 회사에서 정규직 전환 심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대성은 본인이 전환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도, 시도 때도 없이 시키는 주말 출근도 군말 없이 묵묵히 도맡았다.
대성이 다녔던 회사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업계에서는 알짜배기라고 소문난 외국계 중견기업이었다. 대학 졸업 후 알바만 전전하던 대성이 어렵게 취직한 곳이었다.
비록 계약직 이었지만 실제로 입사해 보니 계약직 2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계속 일을 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대성은 그들을 보며 자신의 2년 뒤를 꿈꾸며 지금의 불합리한 현실을 꾸역꾸역 버텼다. 그런데, 그 2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아니, 나는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굳이 나를 뽑으시겠다네..."
점심시간 후 잠시 할 말이 있다며 자신을 불러낸 입사 동기이자 어제까지 같은 계약직 처지였던 형의 말에 대성은 할 말을 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형이라니....
집 안이 유복해서 원래는 졸업 후 띵까띵까 놀았는데 부모님의 등쌀에 못 이겨서 '아르바이트하는 기분'으로 이 회사에 들어왔다는 사람이었다. 주말 출근은 물론 매일 야근을 하는 자신과 달리 평소에 야근을 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늘 주눅 들어 남들의 눈치를 보는 자신에 비해 얼굴에 그늘이라곤 전혀 없는 해사한 얼굴로 항상 웃고 다니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회사는 정규직 전환을 제안했다.
자신이 아니라.
그 생각이 대성을 끝없는 낭떠러지로 밀어 넘어뜨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돼서 괜히 미안하다, 대성아..네가 얼마나 간절히 이 자리를 바랐는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듯 말하는 형의 말에 대성은 더 비참함을 느꼈다. 이 형의 성격이라면 정말로 미안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 텐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뭐든지 긍정적이고 올곧은 생각과 말을 하는 저 형의 말조차 이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니. 아, 이래서 내가 정규직으로 안 뽑힌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든 대성은 점점 더 끝을 알 수 없는 우울감으로 깊이 침잠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리에 돌아왔다가 도저히 이 기분으로는 일이고 뭐고 할 자신이 없었던 대성은 도망치듯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숨을 푹 내쉬던 대성은 화장실 입구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에 다급히 숨을 죽였다. 자신의 직속 상사이자 이번 정규직 전환의 책임자이기도 했던 박과장과 그의 최측근인 최대리의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이번에 대성씨한테 좀 미안하긴 하네요. 그렇게 열심히 해줬는데..."
"뭐, 도의적으론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지만 어쩌겠어. 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그런데 형식씨 아버님이 S그룹 전무이사였다니...! 진짜 깜짝 놀랐어요."
"어쩐지 젊은 친구가 남 눈치도 잘 안 보고 좋은 집에서 자란 태가 나긴 하더구먼. 그런 금수저가 왜 우리 회사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요... 에휴. 부럽다! 나도 그런 금수저 인생 좀 살아보고 싶다!"
변기 위에 앉아 숨죽여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대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쥐구멍이 있다면 어디라도 숨고 싶은 기분. 아니, 없는 쥐구멍이라도 만들어서 그 속으로 영영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짐들을 챙겨들고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온 대성은 그 날 이후로 내리 잠을 잤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잠만 잤다. 정말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대성은 그간 일 때문에 못 잔 잠을 몰아서 자는 거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려고 했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이대로 잠을 자듯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내리 잠만 자고 있는 자신을.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대성은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커튼을 열어 젖혔다. 촥, 열어젖힌 커튼 사이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건너편 건물에 달려있는 간판의 조명 불빛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를 올까 말까 끝까지 고민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저 불빛 때문이었는데. 회사에서 거리도 가깝고 월세도 다른 데보다 비교적 저렴했기에 이 집을 계약한 자신의 선택이 대성은 끝끝내 후회스러웠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이딴 집을 고르지도 않았을텐데.
부모님께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이번 달치 동생들 용돈은? 알바를 다시 구해봐야 하나? 안타깝게도 대성에겐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은 마음도,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성은 재킷을 대충 걸치고 그저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걸었다. 어딘가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걸음은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놓인 길을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이렇게 걷다 보면 뭐라도 나와줄 것 같단 생각과 이대로 이 길이 끝나서 그대로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도 상관없을 것 같단 마음이 공존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주위가 어둑해졌다. 그동안 바닥에 고정해 뒀던 시선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동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평소라면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몇 시인지 따위를 생각하며 당황했을 법도 했지만 대성은 지금 굉장히 차분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원래 자기가 오려고 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던 것처럼 지금의 이 낯선 풍경이 오히려 더 안심되는 기분이랄까.
드라마에서처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런 생각만이 대성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눈앞에 보이던 '사람 죽이는 재개발 반대'라는 플래카드가 지저분하게 걸려있는 낡은 4층짜리 건물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그럼 나도 드라마에서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떨어져도 안 죽어."
"....??"
"아프기만 오지게 아프지."
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손을 탁탁 터는 낯선 사람의 머리 위로 주황색 가로등 빛이 쏟아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