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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라멘가게-3

by 코붱


'누구지? 혹시 날 아는 사람인가...?'

갑자기 날아오는 반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대성은 이곳이 자신이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동네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머리에 두르고 있던 흰 수건을 풀어 한 손으로 부스스 머리를 풀어헤치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실제로도 대성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대성은 왠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지가 뭔데 남 일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이야??

"시..... 신경 끄시죠! 남이사 뭘 하든 말든.....!.."

그런 말을 내뱉은 대성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이었다. 대성은 늘 남의 눈치를 먼저 살피고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남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아왔다. 할 말을 다 하고 산다는 건 그럴 만한 환경과 여유가 주어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라고 대성은 생각해 왔다.

그런데 방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확 내뱉은 것이다. 대성은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면서도 왠지 모르게 답답했던 속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아봐야 하는 거구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여기가 내 가게라서 말이지. 누가 떨어져 죽었다는 가게에 와서 뭘 먹고 싶은 인간은 없을 거 아냐?"

낯선 남자는 풀었던 두건을 다시 머리 위로 두르고 단단히 매듭을 지어 묶었다. 입고 있는 옷도 자세히 보니 옷이 아니라 푸른색 앞치마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뭔가 맛있는 냄새가 어디에선가부터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대성은 남자의 뒤로 보이는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기다랗고 좁은 직사각형 유리창 너머로 따뜻해 보이는 주황빛 조명이 쏟아져내리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음식점이라고 하기엔 이렇다 할 간판조차 없는, 흰색의 벽돌을 쌓아 만든 것 같은 단층 건물이 바로 남자가 말한 그 가게인 듯싶었다.

"죽기 전에 뭐라도 좀 먹고 가지 그래? 배고프지 않아?"

양손을 앞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렇게 말한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성의 뱃속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뭔갈 먹은 기억이 없다. 회사에서 잘리고 나서 몇 날 며칠을 잠만 내리 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뭔가를 좀 먹어볼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잖아.

대성은 붙잡고 있던 옥상의 난간에서 손을 떼고 서서히 몸을 돌렸다. 옥상 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오는 대성을 눈으로 좇던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두르고 있던 앞치마의 끈을 조금 더 꽉 묶었다.




"그래서 뭘 파시는데요?"

가게에 들어선 대성은 허름한 외관과 달리 말끔한 내부의 모습에 작게 놀랐다. 세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카운터 바와 2개의 2인용 테이블이 전부로 규모는 다소 작아 보였지만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히 정돈된 모습이었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고민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대성을 지나쳐 남자는 카운터 바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라멘."

대성은 남자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라멘이라면 사골 육수를 베이스로 한 일본식 라멘을 말하는 걸까? 확실히 듣고 보니 예전에 회사 점심시간 때 다 같이 한 두 번 갔었던 일본식 라멘집에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가게 안을 맴돌고 있었다.

개인적으론 돼지 뼈나 닭 뼈를 장시간 우려낸 일본식 라멘 특유의 국물이 조금 느끼하게 느껴져서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지금은 배가 무척 고프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운터 바와 테이블 중 어디에 앉아야 할지 끝까지 고민하던 대성은 결국 카운터 바 앞의 의자를 하나 쓱 끌어 앉았다. 끝까지 여기에 앉아도 될지 눈치가 보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남자는 대성의 행동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 비어있던 체망에 면발을 넣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물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도마 위에 대파와 당근 등을 꺼내 썰기 시작하는 남자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던 대성은 문득 이렇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급히 말을 꺼냈다.

"사... 사장님은 언제부터 여기서 장사하신 거예요?"

"한 반년 정도 됐나? 원래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어."

"푸드트럭.... 같은 걸 하신 건가요?"

"뭐, 그런 셈이지."

대성은 탕탕탕탕, 소리를 내며 가지런히 썰리는 도마 위 야채들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자취를 시작한 뒤로 요리다운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 대성에게는 마치 채칼로 썬 것처럼 일정한 두께와 모양으로 탁탁탁 썰려 나오는 야채들이 그저 신기했다.

남자는 냉장고에서 삶은 계란을 하나 꺼내 반을 가른 뒤 '삐삐삐삐-'요란하게 울리는 타이머를 끄고 체망에서 면을 건져 찬물을 부어 뜨거운 면을 식힌 뒤 탁탁, 채반을 흔들며 물기를 털었다.

그릇 안에 물기가 털린 면과 야채, 계란 등을 차곡차곡 담는 남자의 손길은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무척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주방 한편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펄펄 끓고 있던 육수를 깊고 둥근 통 안에서 한 국자 떠서 그릇 위에 촥, 붓자 차갑게 식어있던 면발과 야채 위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대성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자, 먹어봐."

"자.... 잘 먹겠습니다."

대성은 꼬르륵, 또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배꼽시계에 다소 민망한 듯 웃으며 남자의 손에 들린 라멘 그릇을 양손으로 붙잡고 서서히 자신의 앞에 내려다 놓고 테이블 위에 있던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을 한 세트 꺼내 들었다.

면발 위로 수북하게 쌓인 숙주와 그 옆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두툼한 고기 두 점. 인스턴트 라면과 달리 된장과 뼈 국물을 베이스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뽀얀 베이지색의 국물에 반달처럼 떠 있는 반으로 가른 삶은 반숙 달걀은 전형적인 일본식 라멘의 모습이었다.


'꼬르르륵'


막상 먹을 걸 눈앞에 두니 그동안 잠잠했던 뱃속이 어서 이 라면을 먹으라고 아우성을 치듯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대성은 숙주와 고기 등을 그릇 옆으로 살짝 밀어내고 뜨거운 국물 안에 얌전히 담겨있는 면발로 먼저 젓가락을 향했다. 대성은 원래 라면을 먹을 땐 면보다는 국물을 더 좋아했지만 오늘은 왠지 면발을 먼저 맛보고 싶어졌다. 아마도 눈앞에서 면이 삶아지는 과정을 봐서 그럴지도 몰랐다.

얇은 젓가락 사이로 착 감겨서 딸려 올라오는 면발은 입에 대지 않아도 탱탱한 찰기가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탄성을 보여줬다. 조심스레 면발을 입안에 집어넣은 대성의 눈이 곧 크게 뜨였다. 이건... 뭐지? 왜 이렇게 탱탱한 거야?

그동안 먹어본 일본식 라멘과는 달리 면발에서 엄청난 찰기가 느껴졌다. 이때까지 먹어본 일본식 라멘의 면발은 굳이 따지자면 얇은 칼국수 면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라멘은 마치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낸 것 같은 한국식 인스턴트 라면처럼 탱탱한 찰기가 느껴졌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 것도 잠시. 대성은 애초에 이런 탱탱한 면발을 더 좋아했기에 오히려 기쁜 마음이 들었다. 대성은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엔 국물을 맛보기로 했다. 그릇을 양손으로 잡고 후루룩, 국물 맛을 본 대성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이건.....일반적인 일본식 라멘이 아니었다. 일본식 라멘 특유의 구수하지만 약간 느끼한 고기 국물 맛 속에 대성이 평소 자주 끓여 먹던 인스턴트 라면 스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개운한 매콤함이 느껴졌다.

'뭐지...? 보기엔 그냥 평범한 라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런 국물 맛이 나는 거지? 어떻게 면발이 이렇게 탱글탱글 하지?'

혼란스러운 마음이 드는 만큼 대성의 젓가락질엔 속도가 붙어 어느새 그릇의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그릇 안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면발을 흡입하던 대성은 문득 자신의 얼굴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눈가 주변에서부터 코를 거쳐 인중에까지 타고 내리던 그 물은 턱을 타고 내려와 대성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까지 맛있어? 눈물이 날 정도로?"

"눈.... 물이요?"

남자의 말에 퍼뜩 놀란 대성은 라멘 그릇을 잡고 있던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축축하게 묻어 나오는 물기를 입에 살짝 대보자 약간 짠맛이 느껴졌다. 그제야 대성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울었던 거지 내가? 아니 그전에 내가 왜 울지?'

대성은 당황스러웠다. 어려서부터 늘 참을성이 많은 아이라고 칭찬받을 정도로 대성은 눈물을 거의 흘려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과 놀다가 부딪히거나 넘어져도 어린 마음에 울고 싶었을 법한데도 대성은 절대로 울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이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울면 지는 거야. 이런 걸로 울면 안 돼.'

특히 남자로 태어나 울면 사람들에게 얕잡아 보인다며 언제 어디서든 절대로 울지 말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뭐에 진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대성은 부모의 말대로 잘 울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어릴 땐 그런 스스로가 대성 자신도 대견하게 느껴졌지만 성인이 되고 서른도 넘은 지금 와서는 오히려 그렇게 울지 않으려고 참기만 한 자신이 가끔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원하던 대학에 떨어졌을 때, 처음 사귄 여자 친구에게 차였을 때, 군대에서 선임에게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리고 바로 며칠 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회사에서 잘렸을 때 역시 대성은 엉엉 울고 싶었다.

스스로의 정신과 마음이 벼랑 끝에 몰렸던 그 순간들마다 대성은 그저 왈칵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도 안 나오던 눈물이 지금 나온 것이다. 겨우 라면을 먹었다는 이유 만으로.

대성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텅 빈 라멘 그릇 위로 젓가락을 올려놓았다.

"사장님. 이 라멘에 혹시 무슨... 약이라도 타신 건가요?"

"?? 그럴 리가. 난 먹는 거에 장난치지 않아. 심지어 그게 내가 만든 라멘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좀 전과는 달리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다부진 표정에 대성은 자신이 굉장히 무례한 말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죄송한 마음에 전보다 더 고개를 조아리며 남자의 시선을 피한 대성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자신의 행동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대체 왜 나는 눈물이 났던 걸까. 대성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이 일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거웠던 마음 한편이 조금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제야 대성은 깨달았다. 자신이 운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보다는 죽기로 마음먹었던 만큼 궁지에 내몰려 있던 마음이 왠지 조금 차분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허했던 뱃속이 든든해져서일까. 대성은 어쩐지 마음이 한결 넉넉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성은 눈물로 번진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리고 드르륵, 의자를 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카운터 바 너머의 남자에게 살짝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다행이네. 계산은 뭐로 할 거야?"

"네?"

숙여있던 대성의 고개가 바짝 치켜세워졌다. 그리곤 뭘 그리 놀라느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앞의 남자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맛있게 먹었다며. 그럼 계산을 하셔야지."

"그... 그냥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이런 예의 없는 청년을 보았나. 어디 공짜로 먹고 튈 생각을 해?"

남자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대성을 쳐다봤다. 대성은 본인이 굳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더니 갑자기 돈을 달라고 하는 남자가 더 어이없게 느껴졌지만 실제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었다.

중요한 건 지금 자신이 카드는커녕 땡전 한 푼 조차 없는 빈털터리 신세라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기에 따로 지갑을 챙겨 오지 않았던 대성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한데 지금은 돈이 없어서.. 일단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올게요. 아니면 계좌 이체라도 해드릴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주세요."

"야, 그러고 그냥 튀는 새끼들이 한 둘이 아니었어.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냐?"

남자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던 대성이 곧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이 손뼉을 마주치며 남자에게 말했다.

"그... 그럼 몸으로 때우는 건 어떨까요? 저 라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체력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대성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탁 터트렸다.

"네가 지금 얼마짜리 라멘을 먹었는 줄은 아니?"

".... 얼마짜리인데요?"

이번엔 대성이 더 당황했다. 라멘이 뭐 끽해야 만 원 2 만원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들려오는 남자의 말에 대성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네가 여기서 평생 일해도 못 갚을 값어치가 있는 라멘이라고 하면, 믿을래?"

너무 놀란 나머지 발까지 삐끗한 대성의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얇게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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