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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라멘가게-8

by 코붱



[그래서 이번에 책 살 때 세이펜이랑 전집이랑 다 같이 사버렸지 뭐야? 이런 핫딜은 1년에 몇 번 안 뜬다고 재이 엄마가 알려줘 가지고~]



바닥에 등만 대면 깨는 일명 등센서 때문에 장장 1시간을 고군분투한 끝에 겨우겨우 잠에 든 아기를 침대에 내려두고 거실로 나온 미정은 곧바로 냉장고에서 무알콜 맥주 한 캔을 꺼내며 마침 걸려온 수진의 전화에 건성건성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근데 우리 애들한텐 너무 이른 거 아냐? 아직 눈에 초점도 잘 안 잡혀 있을 텐데 전집은 좀...."



[어머어머, 주연 엄마.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책 육아의 핵심은 환경 조성이라는 거 자기도 알잖아? 애기가 눈에 초점이 있든 없든 잘 보든 말든 일단 집 안 전체에 책을 쫙~ 깔아놓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수진의 말에 미정은 괜히 자기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미정은 자신의 아기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건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온 본인 스스로의 경험 때문이었다. 미정의 집은 어릴 때부터 TV가 없었다. 대신 거실에는 마치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책장이 있었고 그 안에는 미정이 읽기 좋은 그림책이나 만화책에서부터 부모님이 읽으시는 좀 더 어려워 보이는 책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미정의 부모님은 미정에게 장난감은 잘 사주지 않았지만 책만큼은 언제든 마음껏 사주시곤 했다. 어릴 때는 그런 집이 가끔 숨 막히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어려서부터 책을 가깝게 접해온 미정은 또래들보다 사용하는 어휘의 수준이나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집에서 가지고 놀게 없으니 책을 장난감 삼아 계속 읽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미정은 생각했다.



그 덕분인지 미정은 대학 역시 본인이 가장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의 가장 가고 싶은 학과에 단번에 합격했다. 그런 나름의 성공의 경험이 있었기에 미정은 자신의 아이에게도 본인이 경험한 책의 유용성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래봤자 뭐 해.... 지금은 이렇게 집에서 애나 보고 있는데....'



미정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내 아이에게만큼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지 않으리라. 아무리 좋은 대학 좋은 회사를 다녔어도 애를 낳으면 끝인 삶을 자신의 아이에게까지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책은 결국 사야 했지만 식기 세척기 하나 사는 것도 1년을 조르고 졸라서 겨우 허락한 짠돌이 남편이 애기 책에 몇 십만 원씩이나 쓰는 것을 과연 허락해 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띵동~"



그때, 현관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이제 막 캔맥주의 캔을 따던 미정의 손길이 멈췄다.



"... 이 시간에 누구지?"



[누가 왔어?]



"아..... 응. 그런 것 같네. 애기 아빠인가.... 미안, 수진 씨. 내일 다시 통화하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늘 밤 10시, 11시는 되어야 집에 들어오는 남편의 귀가 시간에 비하면 지금은 겨우 9시밖에 되지 않은 것이 미정은 좀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남편 외에 달리 누가 찾아올만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정은 소파에 파묻혀 있던 몸을 일으켜 슬금슬금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설치 기사입니다~~"



"설치요?"



"일단 문 좀 열어주시죠, 사모님~ 부피가 커서 복도에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어서요~"



갑자기 뭘 설치하러 왔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작정 사람을 밖에 계속 세워둘 수도 없겠다 싶었던 미정은 의아한 마음을 얼굴에 굳이 숨기지 않은 채로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시야 전체를 꽉 채우는 종이 상자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미정의 집 안으로 무자비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다 뭐예요??"



"TV 주문하셨죠? 원래는 8시 설치 예정이었는데 앞 집에서 설치가 좀 늦어져서요. 많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사모님."



"TV요???"



좁디좁은 집의 현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랗고 기다란 상자가 마치 급습을 해오는 적의 공격처럼 순식간에 미정의 집 안으로 쳐들어왔다.



거실 전체를 꽉 채울 기세로 커다란 TV 상자를 보며 미정은 다급히 말했다.



"TV라뇨... 저흰 이런 거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이제 막 박스를 해체하려던 설치 기사가 그럴 리가 없다며 혼잣말을 하며 품 안에서 작은 태블릿 기계를 꺼내 무언갈 확인했다.



"어........ 주문자 성함이..... 박태식 씨....인데... 혹시 남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 박.... 태식이요..."



"그럼 남편 분께서 서프라이즈 선물로 주문하셨나 보네요. 어디에 설치하면 될까요?"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설치 기사의 말에 미정은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TV라니. 그것도 이렇게나 큰 TV라니. 자기가 사달라고 그렇게 조르고 조른 식기 세척기는 장장 1년이나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본인은 이렇게 큰 TV를, 그것도 자기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턱턱 사버리다니.



미정은 상자에 적혀 있는 '75인치 UHD TV'라는 품명을 눈으로 훑으며 보기만 해도 거대했던 상자의 크기와 거의 비슷한 무자비하게 큰 TV의 검은 화면을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멍하게 쳐다봤다.



'책 육아는...? TV 없는 거실은.....? 우리 아이의 미래는.....?'



"사모님...?"



어디에 설치해 달라는 말도 없이 거의 넋이 나가 있는 미정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설치 기사는 대충 여기에 설치하면 되겠냐는 듯이 비어있는 거실의 벽면을 가리켰다. 그곳은 언젠가 천장까지 꽉 들어차는 큰 책장을 들이려고 미정이 일부러 비워둔 자리였다. 그곳에 책장이 아닌 보기만 해도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는 대형 TV가 꼭 들어맞는 것을 보며 미정은 다시 한번 절망했다.



설치 기사의 손에 의해 하나씩 제 모습을 갖춰가는 TV는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는 자기 것이었다는 듯 너무도 익숙하게 거실의 한쪽 벽면을 차지했다.



그 모습이 마치 이 집안에서 네 자리 따윈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미정은 TV를 볼 때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삐리릭~"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설치 기사가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게 아무것도 틀어져 있지 않은 TV의 검은 화면만 쳐다보고 있던 미정은 현관에서 들리는 도어록 해제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드디어 왔다. 오늘의 이 사단을 만든 원수가.



"와! 벌써 설치하고 갔나 보네? 짱 크다!! 역시 TV는 거거익선이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반색을 하며 TV 쪽으로 가는 남편의 어깨를 미정이 거칠게 밀었다.



"이게 다 뭐야? 갑자기 웬 TV??? 내가 식기 세척기 사달라고 했지 언제 TV 사달라고 했어????"



"뭐야... 당신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당신 연애할 땐 영화관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 보는 거 좋아했잖아. 집에서 맨날 애기만 보고 힘들어하지 말고 가끔은 이렇게 큰 화면으로 자기 좋아하는 영화도 좀 보고 그럼 좋을 것 같아서..."



주절주절 나오는 남편의 변명에 미정의 눈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영화??? 웃기는 소리 하시네!! 자기 축구 보고 싶어서 산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놈의 축구, 축구!!!! 축구 봐야 한다고 40인치 모니터 산지가 언젠데 그새 또 TV를 사???? 그것도 나랑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미정의 남편은 엄청난 축구광이었다. 연애 시절 때부터 국내 축구는 물론 해외 축구까지 빠짐없이 챙겨볼 정도로 축구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밤새 잠 한숨 안 자고 해외 축구 경기를 풀타임으로 다 보고 다음날 출근하는 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만큼 좋아하는가 보다 하고 그러려니 넘어가길 몇 년째였다. 문제는 그놈의 축구 사랑이 결혼을 하고 아기가 태어난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자신은 잠 한숨 못 자고 밤새 우는 아기를 달래고 젖을 먹이고 하고 있건만. 남편이란 작자는 방 안에 틀어박혀 밤새도록 축구를 보거나 세상 모르게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는 꼴을 볼 때마다 미정의 가슴속에선 천불이 일었다.



"내가 요즘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애는 2시간마다 깨지, 집 안일은 해도 해도 줄지를 않지!!! 남편이란 새끼는 분유 한 번을 타 볼 생각도 안 하지!!!! 좀 일찍 퇴근해서 애 좀 봐주고 목욕도 좀 시켜주면 얼마나 좋아???? 맨날 야근이다, 회식이다 하면서 집에 오면 항상 10시 11시!!! 진짜로 야근이고 회식이었어???? 그거 다 거짓말 아냐???!! 그 핑계로 집에 맨날 늦게 들어오는 거 아니냐고!!!! 애 보기 싫어서!!!!!"



절규하듯 쏟아지는 미정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남편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혀를 쯧, 찼다.



"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 아빠야. 주연이 아빠!!!! 네 눈에는 혼자서 우리 식구 먹여 살리려고 아등바등하는 나는 안 보여???? 애 보기 싫어서 늦게 들어오는 거 아니냐고?? 야! 나도 우리 주연이 보고 싶어!!! 그런데 내가 그렇게 일찍 들어오면. 돈은 누가 벌어?? 야근 수당 못 받으면 우리 한 달 먹고사는 것도 빠듯한 거 내가 뻔히 아는데!!!"



"그니까 나도 일 한다고!!! 애 어린이집 맡기고 일하면 되잖아!!"



"주연이 이제 겨우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안 됐어... 저 갓난쟁이를 무슨 벌써 어린이집에 맡기려는 생각을 해??? 아니, 당신은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고 불만이 많아???? 집구석에서 남편이 가져다주는 돈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주제에??!!! 나가서 남의 돈 벌어먹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어?!!!"



미정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던 남편의 말에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뭐.....? 편하게...... 놀고먹는.... 주제.... 에....?..."



"아..... 그건 나도 말이 좀 헛나왔고...어...어쨌든!!! 내가 뭐 그렇게 죽을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쥐 잡듯 사람을 잡아??? 그것도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들어온 사람을?? 내 돈으로 내가 사고 싶은 것도 하나 맘대로 못 사냐???"



잠시 당황했던 남편은 오히려 전보다 더 뻔뻔한 태도로 미정에게 큰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정에겐 남편이 하는 말이 귀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구나. 이 인간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전혀 모르는구나. 아니,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만이 미정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미정은 혼자서 뭐라고 뭐라고 일장연설을 쏟아내는 남편을 지나쳐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5분도 안 되어 방 밖으로 나온 미정의 손엔 얇은 카디건과 작은 카드지갑 하나가 들려있었다.



뭐 하는 거냐는 듯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편을 무시하고 미정은 그대로 현관으로 직행했다. 그러자 당황한 남편이 다급히 물었다.



"어.... 어디가? 다 늦은 시간에??"



카디건을 둘러 입고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은 미정은 슬슬 현관 쪽으로 오는 남편을 향해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편하고 좋아 보이면, 네가 한 번 겪어봐. 내 삶을."



쾅! 닫히는 문 뒤로 “야!! 정미정!!!!” 하는 남편의 절망스러운 절규가 짧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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