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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라멘가게-9

by 코붱

"....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달리 갈 데가 없더라고요. 시간은 밤 12시가 다 됐지.. 쪽팔려서 친구나 가족한테는 연락도 못하겠지.."


미정은 어느새 한김 식어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은 루이보스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걸었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어느새 미정의 앞에 모여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미와상과 대성은 이야기가 길어져서 죄송하다며 쑥스럽게 웃는 미정에게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더 얘기해도 돼요. 어차피 우리도 손님도 없고 심심하던 참이었거든."


미와상의 말에 감사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인 미정은 문득 음식이 꽤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분명 라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라멘은 그냥 면을 데치고 만들어져 있는 육수를 부어서 나오는 음식이 아니었나?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게 거의 12시가 넘어가는 즈음 같았던 미정은 벽에 걸린 시계가 벌써 1시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보며 작게 놀랐다.


아니 그전에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본인의 치부를 주절주절 늘여놓는 스스로의 모습에 미정은 솔직히 좀 놀랐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얘기라도 좀 하자던 미와상의 말을 시작으로 더듬더듬 나오기 시작한 말이 점차 길어지더니 이렇게까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을 보며 미정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정도로 지금의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때, 사장의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미정의 상념을 깨려는 듯 주방 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멘 나왔습니다."


"제가 얼른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미와상의 옆에서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성이 기분 좋게 씩 웃으며 한 걸음에 주방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네모 반듯한 검은색 트레이 위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고명이 잔뜩 올라간 라멘을 담고 천천히 미정이 있는 테이블로 다시 다가왔다.


"주문하신 라멘 나왔습니다!"


미정은 제 앞에 놓인 라멘을 천천히 내려다봤다. 마치 사골 국물같이 속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고 뽀얀 국물 위에 얇게 채 썰린 양배추와 숙주가 산처럼 쌓여있는 라멘에는 두툼한 챠슈 대신 잘게 손으로 찢은 듯한 닭고기가 눈처럼 작게 뿌려져 있었다.


"이건..... 무슨 라멘이죠?"


생전 처음보는 라멘이라고 생각하면서 미정은 주방 안쪽에서 행주로 조리대를 쓱쓱 닦고 있는 사장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사장은 들고 있던 행주를 조리대 위에 올려놓으며 미정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닭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만든 시오라멘입니다."


"시오....라멘이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미정이 재차 묻자 이번엔 미정의 앞에 앉아있던 미와상이 바통을 넘겨받듯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시오라멘의 '시오'는 일본어로 소금을 뜻해요. 그래서 간장이 아닌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게 특징이지. 일반적인 라멘보다 국물이 덜 느끼해서 담백하고 맛있으니 어서 들어봐요."


그렇게 말하며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선 미와상은 근처 테이블 위를 괜히 닦고 있는 대성에게 눈짓을 하며 먼저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대성 역시 대답을 하듯 작게 눈짓을 하며 미와상을 따라 주방 쪽으로 향했다.


편하게 먹으라는 듯 자리를 피해 주는 그들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끼며 미정은 괜히 한 번 자리를 고쳐 앉았다.


라멘이라... 임신 이후 지금까지 거의 1년 이상을 일부러 피해온 음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 좋아했던 것도 아니지만 오늘같이 온몸의 기력이 쭉 빠지는 이런 날엔 이렇게 뜨끈한 국물 음식을 먹으며 몸보신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미정은 생각했다.


"잘 먹겠습니다...."


테이블 위에서 젓가락을 한 세트 꺼낸 미정은 우선 소복이 쌓인 닭고기 토핑을 옆으로 치우고 얇게 채 썰 린 양배추와 면발을 한 젓가락 들어 입으로 옮겼다.


'와.... 이 찰기 뭐지..?'


미정은 입안 가득 느껴지는 면발의 탱글함에 먼저 놀랐고 이윽고 느껴지는 양배추의 아삭함에 또 한 번 놀랐다. 보통 국물 요리에 곁들여 나오는 야채 같은 경우엔 숨이 한숨 죽어서 식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라멘 속에 있는 양배추는 부드러움 속에서도 적당한 식감이 느껴져 씹는 재미가 있었다. 심지어 씹을수록 달큼한 맛이 배어 나왔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달달함에 미정은 왠지 모를 행복한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몽실몽실 피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국물을 좀 먹어볼까...?'


면발과 양배추에 닭고기 토핑까지 야무지게 흡입하던 미정은 이번엔 양손으로 그릇의 양 끝을 잡고 천천히 라멘의 국물을 들이켰다. 뽀얀 국물이 미정의 입술 사이로 천천히 흘러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우와......" 하는 미정의 감탄 어린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닭고기 육수 특유의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순식간에 미정의 입안을 점령했다. 그러면서도 끝맛은 담백한 것이 계속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맛이라고 미정은 생각했다.


이번엔 수저에 국물을 담고 면과 양배추, 닭고기 등을 차곡차곡 올린 뒤 그대로 한 입 먹어본 미정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라멘은 생전 처음이었다. 느긋하던 젓가락질에 어느덧 속도가 붙었다. 미정은 면발만 먹어보기도 하고 양배추만 씹어보기도 하고 국물에 닭고기 토핑만 함께 얹어 먹어보기도 하는 등,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라멘을 즐겼다.


'이렇게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게 대체 얼마만이지...?'


벌써 절반은 비워진 라멘 그릇을 보며 미정은 누군가 정성을 들여 차려준 음식이 이토록 맛있는 거였다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느꼈다.


아기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약 2개월간 미정은 제대로 된 밥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보채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느라 끼니를 거르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어쩌다 가끔 아기가 낮잠을 좀 길게 다 준다 싶을 때 커다란 스테인리스 양푼 그릇에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대충 때려 넣고 간장에 비벼 먹는 정도가 그나마 잘 차려 먹은 음식이라고 말할 만했다. 물론 그마저도 아기가 잠을 안 자면 못 먹는 날이 허다했다.


그렇게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자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미정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아기가 태어난 뒤론 늘 아기가 먼저였고 그다음은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들어온 남편이었고 그다음이 미정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본인의 우선순위가 밀리는 것이 처음엔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아니, 여길 정신도 없었다. 그냥 다들 이렇게 산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미정은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이었는지를 미정은 오늘 밤 자신의 집에 들이닥친 75인치 대형 TV를 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답시고 주절거리는 남편을 보며 절감하고 또 절감했다.


'난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날 희생하기만 했을까....'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라멘 그릇을 양손으로 잡고 미정은 다시 한번 뽀얀 닭고기 육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뜨끈한 국물이 텅 비어있는 것처럼 허했던 미정의 속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동시에 천천히 붉어져가던 미정의 눈가에서 기어코 눈물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


"소... 손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그릇을 옆으로 치워두고 눈물이 흐르는 눈가를 양손으로 훔치는 미정의 모습에 깜짝 놀란 대성이 후다닥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런 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던 미정은 어렵게 울음을 참으며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대성에게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너무 맛있어서 그랬어요..... 괜찮아요 저는..."


자신이 가게에 들어오고 나서도 1시간가량이 걸려서 나온 이 음식은 아마도 이 가게의 주력 메뉴는 아닐 것이다. 오직 자신을 위해 메뉴에도 없는 음식을 만들어준 사장님이, 차갑게 식은 몸을 먼저 데우라는 듯 따뜻한 차를 내어준 아주머니가, 울고 있는 자신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후다닥 주방 안쪽에 가서 깨끗한 손수건을 하나 꺼내오는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미정은 너무도 고마웠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라멘 그릇을 향해 미정은 작게 목례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낀 충만한 감각이 미정의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오는 듯했다.


"사장님. 계산할게요."


드르륵, 의자를 밀며 일어난 미정은 주방과 홀 사이에 있는 카운터 바 앞으로 다가가 사장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조리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사장이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카운터 바 쪽으로 다가왔다.


"계산은 이미 하셨습니다."


"네...? 그게 무슨...."


깜짝 놀라 그렇게 묻는 미정에게 사장은 카운터 바 위에 올려진 작은 나무 판넬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휘갈겨 쓴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말만 잘하면 공짜!]








출입문 뒤로 사라지는 미정의 모습을 좇던 대성은 줄곧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던 질문을 사장에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장님. 여긴 대체.... 무슨 가게인 거예요?"


"라멘집이잖아."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뭐가 궁금한 건데? 제대로 말을 해야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대성 씨는 그게 문제야. 제대로 말을 해야 제대로 알려주든 말든 하지! 대학이 별로라서 그런가? 왜 이렇게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순간 대성의 머릿속으로 너무도 생생하지만 제발 잊고 싶은 예전 직장 상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일한 지난 2년간 대성의 상사는 대성에게 인격 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해댔다.


'용케도 버텼네....'


문득 그런 스스로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짠하게 느껴졌던 대성은 순간 괜히 물어봤나 싶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남은 3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여기서 일을 하기로 한 이상 한 번쯤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대성은 흠흠, 괜히 목청을 가다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보름달만 뜨면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존재가 오고... 가끔은 돈도 안 받고 공짜로 음식을 주기도 하고... 라멘 한 그릇에 가격이 딱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님이 주는 대로 받기만 하는데 벌써 한 달 가까이 멀쩡히 영업 중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에요. 대체 여긴 어떤 곳인 거죠?"


대성의 말에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내리 깔려있던 사장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말해주면. 감당할 자신은 있고?"


그렇게 말하는 사장의 눈빛은 평소보다 한층 낮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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