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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 글 Apr 10. 2016

있을 곳이 있다는 것

『우는 어른(泣く大人)』  2001년 7월, 카도카와 문고


#읽기 전 유의사항

하나. 어디까지나 이 번역은 번역자의 취미생활의 일부로 스크랩은 허용하지 않아요.

둘. 괄호, 사진+α은 이해를 위해 번역자가 넣은 것으로 본문에는 없어요.

셋. "의역"한 부분이 많으므로 연구대상으로 할 경우 직접 본문을 참조해 주세요.



있을 곳이 있다는 것 居場所がある、という気持ち


작년 여름, 야광충(夜光虫)*을 봤다. 처음이었다.

그런 게 있는 지도 몰랐기 때문에 넋을 잃었다.


야광충은 바다에 사는 플랑크톤으로 물이 흔들리면 녹색으로 빛난다.

밤바다를 작은 배로  저어갔는데

뱃머리를 가르는 물의 파문에

야광충이

마치 반딧불이를 녹인 것처럼

반짝반짝 흘러가고 있었다.


야광충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 작다고 하니

이렇게 빛나는 건

몇 천, 몇 만 정도의 야광충이 있기 때문일 테다.


물속에 손을 넣자

손의 윤곽이 희미하게 녹색으로 빛나며


손가락 끝에서

갈라지는 물의 흐름에 따라 그 빛이 흘러갔다.


마치 손이,

물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하늘도 바다도.....



어둠이 좋다.


어두운 편이

눈과 마음이 민감해지니까

사물이 뚜렷이 보이는 듯하다.


물론 이것은 아주 역설적인 것으로 어둠 속에서는 작은 것이라도,


빛이-그 형태까지-

뚜렷이 보일 뿐이지만


나는 그 빛이 좋은 것이다.

동경에서 태어나

동경에서 자란 탓인지


빛이 없는 어둠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자기 전에 불을 끄면 창 밖이 너무 밝아서 놀랄 때가 있다.


여기저기 세워진 가로등 불빛 덕분에

하늘이 어렴풋한-기묘한-색으로 보이거나

구름이 보이거나 하는 것이다.

방 안이 훨씬 어둠이 짙다.




야행성이기 때문에 난 밤에 자주 돌아다닌다.

내게 있어 밤은 밝은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정신적으로-


야광충과 똑같다.



바 카운터의 간접 조명이라든가,

샌들을 신고 불꽃놀이를 하려고 가져가는 촛불 한 자루라든가...


어둠 속에서는 작은 불빛이 정말 밝다. 그리고 그 불빛에 위로를 받는다.




미국의 한 시골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

한밤중에

슈퍼에 가면 안심이 되었다.

거대한 주차장, 눈이 아플 것 같은 밝은 등, 엄청난 양의 식료품.


나는 정말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색색의 야채와 과일들을 보고

질릴 정도로 가득 진열되어 있는 통조림의 라벨을 하나씩 읽으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쿠키상자를 쳐다보고

거대한 우유병이나 무조작적으로 놓여있는 돼지 머리 사이를 산책했다.

몇 백장이나 진열되어 있는 연하장은 모조리 읽었고

화장실 휴지의 포장이나 가격을 비교했다.


그곳에 가면 뭐든 있었고

몇 시에 가든 열려 있었다.


한적한 시골길은 어둡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런 길을 차로 15분쯤만 달리면 그 슈퍼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곳에는 사람이 있고 생활이 있으며

주변의 어둠까지 그곳에서 새어져 나오는 하얀빛에 물들어 있는,

그 인공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안심시켰다.


최근에는 메구로 길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불빛과 롯폰기 길에 있는 새벽까지 열려있는 북 센터의 빛에 위로를 받고 있다.



한밤중에 남편과 싸우고 정처도 없이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돌아다닐 때


그 두 곳의 불빛은 마치 피난소 표시 등처럼 눈에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발이 향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


불빛은 넘치는 듯한 유혹으로

사람에게, 여기 있어도 된다라는 안심을 주는 것 같다.




난 운전은 못하지만

한 밤 중의 고속도로는 좋아해서 자주 택시를 탄다.


양쪽에 높은 펜스가 있는 곳이 특히 좋다.


(차를 타고 있으면)

가로등에서 쏟아지는 둥글고 새하얀 불빛이나,

자는 아기 그림이 붙여져 있는 간판 같은 게

쑥쑥 뒤로 사라져 가는 (그런 느낌도...)



다이코쿠 후토(大黒埠頭)*에 놀러 가는 게 취미였던 적이 있다.

대략 5년 전.

다이코쿠 주차장은

동경에서 요코하마에 가는 도중에 있는 큰 주차장으로

주말 밤에는 젊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바로 밑에 있는 도로에서 레이스 같은 걸 하고 있어서 개조된 차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차를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의 집합소란다.

확실히 재미있는 모양을 한 차나,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를 내며 달리는 차가 있었다.


그곳을 좋아했던 건, 그곳의 밝음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인공적인 그 밝음.


거리낌 없이 하얗게

반짝반짝거리는 불빛.

한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있고


게다가 모두,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



내가 있어도 될 것 같은 공간이었다.



그때는 그곳에 가는 게 꽤 습관이 되어 있었다.


차를 자랑하러 가는 것도

같이 갈 사람이 있는 것도

애인과 만나는 것도

먼 목적지를 위한 잠깐 동안의 휴식도 아닌데


애당초 거기까지 택시를 타고 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것이다.


이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그곳에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게 누구라도 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곳.

그런 느낌이 그곳에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머리를 염색하거나

오토바이를 타거나

묘한 약을 시도해보거나

남자와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거나 해서


근신이나 정학 같은 처분을 받는 게 '불량'이라는 것이라면

난 학교를 다녔던 근 20년간 한 번도 불량한 짓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나는 쭉 불량했고

물론 지금도 불량하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불량한 사람들은 대부분 불빛을 좋아한다. 아마도 말이다.

그 불빛에 위로받으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한 약속을 안 지키면 마당으로 쫓겨났는데

집안의 문이라고 하는 모든 문을-창문도-잠갔다.


오기를 부리며 태연한 척은 했지만

온몸이 어둠 속에 파묻힌 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집 안의-변함없는-불빛이

정말 터무니없이 멀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가 슬퍼,

울고 싶어 질 때도 있었다.


어른이 되니

이젠 더 이상

누구도 어둠 속으로 쫓아내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이겠지만.





*야광충(夜光虫):편모 충류에 딸린 원생동물(原生動物)

*다이코쿠 후토(大黒埠頭):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츠루미 구에 있는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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