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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 글 Apr 13. 2016

음악에 대해서

『우는 어른(泣く大人)』  2001년 7월, 카도카와 문고


#읽기 전 유의사항

하나. 어디까지나 이 번역은 번역자의 취미생활의 일부로 스크랩은 허용하지 않아요.

둘. 괄호, 사진+α은 이해를 위해 번역자가 넣은 것으로 본문에는 없어요.

셋. "의역"한 부분이 많으므로 연구대상으로 할 경우 직접 본문을 참조해 주세요.



음악에 대해서 音楽について


음악은 내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이다.


내겐 '음악적'인 재능은 없다.


악기도 못 다루고

작곡도 못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음악 앞에서

철저하게 고분고분해지며


무방비하며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비처럼

그저 흐른다.


한결같은 아름다움으로, 말이다.



10년쯤 전에

한 여성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힘차며 농밀한 문체의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그 날,

시치미를 뗀 얼굴로 그라파*(포도를 압착 후 나머지를 증류한 것으로 숙성하지 않아서 무색의 이탈리아 브랜디)를 연거푸 몇 잔이나 마셨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소설을 쓰자고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그녀의 박력에 넋을 잃었다.


"일을 할 땐 어쨌든 에너지가 필요하니 음악이 없으면 안 돼."

그녀는 말했다.

"요즘엔 글 쓸 때 글렌 굴도*(Glenn Gould,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바흐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담은 음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명성을 얻었다)를 자주 들어."


글렌 굴도.

나는 놀랐다.


-그렇게 긴박한

_그렇게 정열적인

-그렇게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를 들으면서

이 사람은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https://youtu.be/O-dOkP0C6As?list=RDO-dOkP0C6As

글렌 굴도의 피아노 음률에 대항하는 듯한

템포로

집중력으로

감성으로... 말이다.


그 당시의 내겐 그것이

멋있게도 또 애절하게도 보였다.


동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혼재하는...




그것은 소모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빠듯한 공간에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써 대다가는.


하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러한 일일 테다.



나 자신은 무언가를 쓸 때 음악은 듣지 않는다.


하지만 생활에 음악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쓰기 위해서,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음악은 일종의 약(薬)이다.


신경을 흥분시키거나 가라앉히거나.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장소에

발을 닿게 해서 마음을 요동시킨다.



음악을 듣고 싶다, 고 바랄 때에는  

많든 적든

마음이 요동치길 바랄 때이다.


무엇 때문이냐고 한다면

아마-

나 자신의 진폭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흔들려지지 않는 한


어떤 악기도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악기가 되는 일이며


그것이

싼 것이든 장난감이든

소리가 나쁘든 고장이 나 있든

악기인 이상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내 친구 중에

아침에 듣는 음악과 낮에 듣는 음악,

밤에 듣는 음악을 완벽하게 구분해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친구에 따르면 첫 몇 소절만 들으면 그것을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침용, 이것은 점심용, 이라는 식으로.


기분이나 취향 문제겠지만

그래도 내게는 그것이

무언가를 정해 놓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아침에는 반드시 우유를 마신다,라든가 술은 밤에만 마신다라고 정해놓는 것처럼.


한 가지 곤란한 건, 이라고 친구는 말했다.


한 가지 곤란한 건 말이야, 음악이 온천지에 흘러넘치고 있다는 거지. 대낮에, 길거리에서 말이야 밤용 음악이 흐르고 있거나, 밤인데 바에서 아침용 곡이 틀어져 있거나 한단 말이지. 그럴 땐 기분이 안 좋아져.
화가 난다고나 할까


음악을 즐기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예를 들어 [ROMANTIC]이라고 붙여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의 앨범에서

특히 마스카니 오페라로 시작될 때의 느낌을 좋아한다.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챠이코프스키로 이어져

작은,

흐르는 듯이 아름다운 열 두곡이 수록된 이 앨범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로 끝난다.


[DIE KLEINORGEL]이라는 제목의 16~18세기의 오르간 곡을 모아놓은 앨범도 좋다.

싸늘하고 고요한 냄새가 난다.



가을에 여동생과 북유럽을 여행했을 때

스웨덴에서 머물렀던 호텔이

마을 중심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푸르른 전원형 호텔, 같은 곳으로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면 2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택시는 거의 없고

나도 여동생도

걷는 걸 좋아하기도 해서

매일 걸어 다녔다.


마을까지 한 시간.


녹음이 짙었고

치안이 좋다고는 하나

밤에는 깜깜한, 한적한 길이었다.


"노래 부르면서 걸으면 괜찮아."


여동생이 말해서 우리들을 그렇게 했다.


단지 여동생과 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서 그런 지 둘 다 알고 있는 곡이 별로 없어서

결국 동요와 그리고 왜 그랬는지 체커즈*(THE CHECKERS:80~90년대에 일본을 들었다 놨다 했던 남성 7인조 그룹)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 확실히 힘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용기가 샘솟는다고 할까.

활발해진다고 할까.


그때 떠오른 게 아빠였다.


우리 아빠는 콧노래를 싫어했다.


부엌에서 엄마가 무언가 흥얼거리면 얼굴을 찌푸렸다.


품위가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노래를 부르면 혼이 났다.


그런데도 아빠는 때때로

같이 산책이라도 할 때면 휘파람을 불었다.


작았던 나는 아빠가 태워 준 어깨 위에서

휘파람은 저녁에 들으면 쓸쓸하다고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오히려 밤에 듣는 게 좋다고 생각한 적도.


음악에는 다양한 효능이 있다.


신디 로퍼를 들으면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와 밤새 수다를 떤 것 같이 시야가 탁 트인 기분이 들고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는 옛 연인같이 다정해서 눈물이 난다.


한 음악이

특정한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 그리고 어떤 상황과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고집스러워서

그것을 들을 때마다

쑤욱 밀려와 현실을 위태롭게 만든다.


좀 더 솔직히

가사에 끌리거나 위로받거나 할 때도 있다.

뮤지컬 곡목으로 나중에 칼리 사이먼이 커버한 [BY MYSELF]라든가

하이포시(hi-posi)라는 불가사의한 2인조 그룹의 "당신의 모든 게 좋아"라든가

수잔 베가(Suzanne Vega)의 [TOM'S DINER]라든가

나가부치 쯔요시(長渕剛)의 [울어 양아치]라든가-


목소리도, 곡도 좋지만

가사에 끌렸었다.


어떤 거냐고 한다면

예를 들면 [BY MYSELF]는 이런 가사.



I'll go my way by myself, This is the end of romance

I'll go my way by myself, love is only a dance


I'll face the unknown, I'll build a world of my own

No one knows better than I myself, I'm by myself alone


위로받는다고 한다면

환경음악이라는 것도 있다.


이상한 말이다.


그것에 대해 나는

어느 쪽이냐고 하면 회의적


뭐가 귀에-혹은 신경에-좋은 가는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공급하는 것은 수요가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한밤 중에 아빠 엄마가 거실에서 레코드를 듣고 있을 때가 있었다


레코드에서는 재즈가,

또 샹송이,

또 하와이풍 음악이,

[돌아온 술주정뱅이]가 흘러나왔다.


한밤 중 우연히 잠이 깨서 머뭇머뭇 거실에 나가면 그곳이 전혀 다른 곳인 것처럼 보였다.


불빛히 묘하게 밝고

아빠도 엄마도 기분이 좋아 보였으며

술이나 간단한 요리 냄새도 났다.


음악은 항상 곁에 있었다.


비처럼 내려와서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하기 전에

스며들어버린다.


그리고 위로를 받거나 동요되거나 해서 마음이 출렁이는 것이다.




(음악은, 결국)

어떤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


그것으로 우리는

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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