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 비장의 작품집』중에서(매거진하우스 2004년)
아빠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우리들은 오랜만에 셋이서 점심을 먹었다.
"푹 쉬다가 가거라."
아빠는 느긋하게 말했다.
"놀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러냐. 화를 내도 좋다."
묘우가*(생강순)가 들어간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아빠가 말했다.
"지금 시작된 게 아니지 않냐."
엄마가 레코드 판을 뒤집으러 간 사이, 내가 작은 소리로
"의사 선생님한테 말해 보자고요."
라고 해봤지만 아빠는 힘없이 웃고는
"눈 감아 줘라. 겨우 전화 놀이니."
하고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플레이어에서 GI 블루스가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 참-.
난 밥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으면서
아빠의 느긋한 옆얼굴을
울그락불그락거리며 쳐다봤다.
"오늘 12시까지 기다려볼래?"
갑자기 엄마가 말했다.
"그러면 그 사람 목소리 들려 줄게."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만약 내가 있는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면 엄마도 정신 차릴지 모른다.
전화놀이라니, 그 자체가 불건전하다.
어쨌든 엄마를 현실로 데려와야만 했다.
"그래. 그러자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남편 회사에 전화를 걸어 늦은 귀가를 알렸다.
열 두시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빠와 엄마와 나는
할 일도
대화도 없는 채로
그저 앉아서 잡지를 뒤척이거나
귤을 까먹고
아마낫토를 먹고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BGM을 듣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항상 이 BGM 속에서 살았었다.
지금은 아득한 나날들-
엘 씨의 콧소리,
엄마의 흥얼거림.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한 사람씩 씻고
우리들은 그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걸려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긴장감에
작은 소리만 나도 흠칫했다.
유령 따위는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밤중에 화장실 가는 것은 무서웠던 그때의 그 기분과 닮아 있었다.
우리들은 12시 반까지 기다렸는데
가장 먼저 포기한 건 아버지였다.
"시시하군. 난 먼저 잘게."
지친 아빠는 파자마를 질질 끌며
2층 침실로 들어갔다.
"이제 알았죠? 전화 같은 건 엄마의 환상이야."
나는 말했지만 엄마는 침착했다.
"오늘은 사정이 있었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방긋방긋 웃었다.
"그것보다 너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남편 보기 그렇다."
나는 한, 만 번쯤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엄마가 안 그래도 돌아가려고 했어."
"그럼, 이건 선물"이라며
차라든가
가쓰오부시라든가
아마 낫토라든가를 엄마는 종이가방에 산처럼 채워 줬다.
"또 오렴."
나는 더 이상 엄마와 싸울 기력도 없어 엄마가 건네준 무거운 종이가방을 들고
비틀비틀 차에 올랐다.
베이지색 시트에 기대 눈을 감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동을 걸고 난방과 라디오 스위치를 켰다.
그리고
큰 도로에 나왔을 때
.
나도 모르게 차를 세웠다.
유독히 밝은
전화박스 안에
아빠가 있었던 것이다!
파자마 차림에 점퍼를 걸치고
큰 카세트를 껴안고-
난 한참 동안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봤다.
"질렸다 정말."
핸들을 잡는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 나간다.
"농담이지 이거."
아빠는 매일 밤, 저렇게
전화박스에서 러브 미 텐더를 틀고 있는 걸까.
나는 어이가 없는 듯한,
화가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액셀을 밟으며
느릿느릿 전화박스를 지나갔다.
백미러로
"도대체 뭐야, 정말."
그 말을 내뱉자 눈물이 고였다.
빨리 돌아가자, 고 생각했다.
빨리 돌아가서 커피라도 마시자.
그리고 노부부의 전화놀이를
남편에게 이야기해줘야지
남편은 뭐라고 할까?
난 킥킥 웃으며
심야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남편과 아들과 애견이 기다리는 우리 집을 향하여.
終
---初出 『소설 NON』 198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