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근 <10년 전의 나에게>
잘 지내니 나는 무사해
바람들 몇 개는 이뤄지고
몇 번은 넘어져 아파하고
사랑이 뭐라고 미쳐보고
이제 보니 내가 가장 날 미워했네
내가 나에게 사과해
잘되는 게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앞만을 보며 살았네
뭘 얼마나 행복해지겠다고
불행한 노력으로 날 괴롭히긴 싫어
시간이 지나면 10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태어나던 그때 이미 난 소중했네
내가 나에게 사과해
다 가진 게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조금 더 조금 더 하며 살았네
시간 참 빠르네
뭘 얼마나 행복해지겠다고
불행한 노력으로 날 괴롭히긴 싫어
시간이 지나면 10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그 조금 모자란 사랑이
그 조금 모자란 날들이
네가 행복할 기회들이었음을
뭘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이 작은 고민들로 날 재촉하긴 싫어
시간이 지나면 10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 한동근 <10년 전의 나에게>
"제주도요? 치열하게 살아야 할 나이에 거기서 뭐하십니까?"
6년 전 함께 일했던 PD가 3년 만에 전화해 나에게 쓴소리를 던졌다. '오랜만에 함께 일해보자.'는 그의 제안에 내가 '제주도민이라 서울로 출퇴근할 수 없다.'고 하자, 대뜸 이렇게 쏘아붙인 것이다. 순간, 날카로운 송곳에 살이라도 베인 듯 따끔했다. '내가 지금, 잘못 살고 있나?', '죄를 짓고 있는 건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은 내 삶을 의심했고, 빠르게 죄책감으로까지 이어졌다. 내가 잠시 머뭇거린 사이, 수화기 너머의 PD는 쉴 새 없이 훈계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 화려한 경력을 왜 썩히고 있냐느니,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느니 하면서. 순간, '서울'이란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그걸 안 하려고요."라고. 잘 못 들었는지 아니면 이해를 못했는지, 그는 당황한 말투로 되물었고, 나는 한 번 더 힘주어 대답했다.
"치열하게 사는 거요. 그거 안 하려고 제주도민이 된 거예요."
그러자, 그는 '뭐, 좀... 쉬는 것도 나쁘진 않죠.'라며 얼버무렸고, 서둘러 마무리 인사를 전하며 어색하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오지랖이 경치게 넓은 것이 문제였을 뿐.
10년을 넘게 나는 '방송작가'로 쉬지 않고 일했다. 일주일에 하루, 많게는 3일을 밤새며 글을 썼고, 자막을 썼다. 때론 섭외가 잘 안 돼서, 때론 섭외가 엎어질까 봐 마음을 졸여야 했고, 촬영을 하기 전에도 촬영을 한 후에도 마음을 놓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10년을 내가 아닌, '작가'로만 살다 보니 조금씩 문제가 발생했다. 전화벨만 울리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면증과 불안증에 시달렸으며, 허리, 목, 위, 장, 손목에 손가락까지 그야말로 온몸이 '더 이상 못 버티겠다.'며 아우성쳤다.
그런데, 지금도 내가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럼, 내 삶은? 내 행복은? 그 질문에 답을 하고 싶었기에 나는 '제주도민'이 된 것이다. 새로운 도전? 또 다른 꿈? 그런 거창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닌,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이런 내 마음을, 내 생각을 고스란히 담은 노래를 얼마 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제 보니 내가 가장 날 미워했네
내가 나에게 사과해
잘되는 게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앞만을 보며 살았네
누가 부른 건지, 제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 노래가 한동근의 <10년 전의 나에게>란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치열했던 나의 삶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헛된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거기에 '나의 행복'이 빠져있었을 뿐. 그래서 서글펐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때의 나에게.
그래서 지금, 앞만 보고 달리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뭘 얼마나 행복해지겠다고
불행한 노력으로 널 괴롭히지 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