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피디 Oct 07. 2019

착하면 호구가 된다는 세상에게

잊기 쉬운 마음

 한 직장에 오래 머물면서 권태로움이 숙명처럼 따라왔다. 같은 시간, 같은 업무, 같은 사람들 속에서 하릴없이 달리다 보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쳤다.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건지 일이 나를 타고 달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으나 보통은 내가 일에 질질 끌려가는 쪽이었던 것 같다. '패기'와  '열정' 없인 달리 수식할 길이 없었던 20대 초반의 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하루살이 그 자체였다. 업무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 지겨웠고 시간은 느리게 갔다. 열심히 하기보단 요행을 부려 적당히 하기를 좋아했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기보단 상사의 입맛을 맞추는 데에 능통했다. 그러다 보니 '일' 자체가 주는 만족감과 성취감보다 월급날 통장에 찍히는 액수만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자주, 그리고 금방 지쳤다.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문제는 이 권태로움이 내 내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자꾸 뻗어나가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마음을 열고 진솔한 내면의 대화를 나눈 지 오래였다. 회사는 그저 돈을 버는 수단에 그쳤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관계는 귀찮은 일이고 그들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주 사적인 필요에 의해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실수를 자주 했다. 쉽게 마음을 열지도, 주지도 않을뿐더러 애써 찾아오는 마음까지 귀찮게 여겼다.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누군가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정도는 아니었을지라도 속은 이토록 시커맸다. 셋보단 둘이, 둘보단 혼자가 편했다. 아주 나약하고 지친 상태로 고립되고 있었다.


 Y를 처음 본 건 권태로움이 나의 내면에서 극에 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신입사원으로 우리 팀에 들어온 Y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후리 한 티셔츠에 구멍이 송송 뚫린 샌들을 신고 출근하는 더운 여름날, Y는 위아래로 반듯한 정장을 갖춰 입고 나타났다. 적나라하게 왁스칠 해 한 올의 오차도 없이 뒤로 넘긴 앞머리, 반듯한 외모, 그에 걸맞은 똑 부러지는 말투. 몸에 밴 매너 하며 주변을 압도하는 신사적인 태도까지. 모든 것들이 '이질감' 그 자체였다.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와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온갖 추측들이 Y의 입사와 동시에 난무했다. 나 역시 경계태새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았던 Y는 의외로 수더분하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었다. 나는 Y의 사수였고 우린 업무적으로 자주 겹쳤다. 함께 일하는 시간이 많은 만큼 친해지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Y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내가 조금만 우울한 기색을 보이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놓고는 기어코 그 대답을 듣고 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뒤에 슬쩍 다시 물었다. 그럴 때마다 아주 친절한 애프터서비스를 받는 느낌이었다. 


 과거의 어떤 고민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쉬이 질문세례를 퍼붓는 무례함이 있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던데 그렇게 쏟아낸 불편한 진실 뒤엔 늘 공허함이 쫓아왔다. 그 성질이 꼭 그 무례함과 비슷했다. 하지만 Y는 조금 달랐다. Y의 태도엔 늘 타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배려가 묻어났다. 나는 그것을 감히 '진정성'이라 정의하기로 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굳이 주변 동료들의 것까지 서너 잔씩 살뜰히 챙기는 Y를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푸근했다. 항상 군것질 거리를 봉지 채 들고 와 여기저기 다니며 나눠먹기 바빴다. 비가 오는 날이면 기어코 동료들을 모아 칼국수집으로 인도했고, 눈이 오는 날이면 라떼 맛집을 찾아 공유하며 점심시간에 함께 가자고 했다. 정 많고 선한 인품을 가진 Y의 세상엔 늘 좋은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그런 Y의 선한 인품이 정점을 찍어 빛을 발하던 사건이 있었다. 가로 폭만 족히 1미터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탕비실의 쓰레기통이 차고 넘쳐 바깥까지 쓰레기가 흘러넘친 날이었다. 재활용, 일반쓰레기 할 것 없이 온갖 쓰레기가 뒤섞여있었다. 그 날따라 청소를 도와주는 여사님께서 출근을 하지 않으신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막으며 한 마디씩 했지만 모두들 쓰레기 더미 위에 본인들의 쓰레기를 은근슬쩍 얹기만 할 뿐 그 누구도 선뜻 나서서 치우지 못했다. 나 역시 그랬다. 외부 미팅이 끝나고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그제야 여사님께서 출근을 하신 건지 탕비실 쓰레기통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직 고약한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레기통 위에 노란색 메모지 한 장이 붙어있었다.


'급한 대로 쓰레기 정리했습니다.

분리수거는 임의로 했으나 확실치 않으니

여사님께서 한 번만 더 확인해주세요.

항상 수고 많으십니다'


 자필로 또박또박 쓴 글씨체를 자세히 보아하니 틀림없는 Y의 소행(?)이었다. 곧장 Y에게 달려가 물었다. Y는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었고, 다들 하기 싫은 일이라면 본인이 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 귀한 마음이 인간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애정의 대상이 같은 사무실을 쓰는 동료들인지, 이 쓰레기를 혼자서 치워야 했던 여사님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남들이야 어떻든 자기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세상에서 기꺼이 타인을 위해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던 Y를 보면서 나는 한없이 가벼워 잊기 쉬운 마음을 떠올렸다. 사람에 대한 애정, 진심 어린 관심, 충만한 위로, 은밀한 정, 함께하는 기쁨, 이타적인 배려. 그것은 내가 잊어가던 '인간애'였다.


 사람은 외부의 환경이나 어떤 영향에 의해서 단지 변해갈 뿐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와 함께 뒤섞일 때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태어나자마자 가족이라는 소속 안에서 부모와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감정을 나누는 모든 행위들이 그런 증명들의 시작인 것이다. Y는 그 뜨거운 인간애의 본능을 자극했다.


 때 묻은 일기장을 넘기다가도 유독 손길이 느려지는 장은 꼭 누군가와 함께 만든 추억과 마주할 때였다. 혼자가 편하다던 나조차도 그랬다.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올라 웃음 짓게 하는 순간도 돌이켜보면 결코 혼자인 순간이 없다. 하다못해 땅을 치며 후회하는 순간들도 모두 '함께'였고, 그리움에 몸서리치던 순간들도 모두 '함께'였다. 인생은 결국 혼자라지만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인생이다. 착하면 호구라고 말하는 세상에게 나는 Y처럼 당당히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이 어떻든, 얼마나 차갑든 기꺼이 호구가 되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