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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피디 Jun 24. 2020

지구 반대편에서 비행기를 놓쳤다.

두려움과 맞써는 법.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놓쳤다. 그곳은 한국과 1만 킬로나 떨어져 있는 지구 반대편 뉴욕이었다. 수중에 들린 돈이라고는 단 돈 5만 원이 전부였고 나는 불행히도 혼자였다. '국제 미아'라는 단어가 허공에 맴돌았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고 오줌이 마려웠다. 내 인생 손꼽히는 일대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맛에 푹 빠진 20대 중반의 나는 점점 먼 나라로 떠나는 비행기에 과감히 몸을 실었다. 일본, 대만, 홍콩을 넘어 유럽까지 점점 나만의 여행지도를 확장해나갔다. 그중 뉴욕은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휘황찬란한 도심 풍경과 자유분방한 영혼들의 하모니는 그 어떤 도시와도 대체될 수 없었다.


14시간을 쉼 없이 꼬박 날아서 도착한 뉴욕의 모습은 기나긴 비행의 노고를 단숨에 녹이기에 충분했다. 손꼽히는 명소로 알려진 타임스퀘어는 밤 12시가 되어도 대낮처럼 밝았다. 과연 천조국의 명성다웠다. 미드에서만 보던 노란색 택시들의 행렬, 미키마우스 탈을 쓰고 길거리 극을 벌이는 사람들. 클래식 정통 공연에서만 들릴 법한 현악의 하모니가 환락의 거리에 울려 퍼졌다. 높게 쏫은 타워들 사이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차했고 사람들은 모두 개성이 넘쳤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뉴욕 여행은 그 땅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게 환희 그 자체였다.


뉴욕에서 여행하는 동안에는 밤마다 숙소 옥상에 올라갔다. 맨해튼 중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미드타운에 위치해 있던 숙소는, 뉴욕의 야경을 물들이는 주변의 여느 빌딩들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높은 건물이었다. 미드타운의 야경을 감상하기에 제격이었다. 북적이는 야경 명소에 돈을 지불하고 입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곳은 빌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편하게 출입할 수 있는 라운지로 잘 꾸며져 있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였다. 빠듯한 여행 일정을 소화하느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밤마다 그 난간에 서서 뉴욕의 야경을 바라봤다. 아껴두었던 플레이리스트를 틀자 ed sheeran의 new york이 흘러나왔다. 눈물이 날만큼 감격스러운 순간이 밤마다 펼쳐졌고 약속된 시간은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쿨한 귀국을 해 본 적이 없다. 여행은 내 생활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오만가지 현실적인 문제들과 시, 공간 적으로 떨어져야만 한다. 자의건 타의건 인지했건 무지했건 어느 정도 ‘현실 도피’ 효과를 본다는 말이다. 하여 여행지에서 약속된 시간을 모두 할애하고 다시 자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현실 반대편 세계에서의 시간을 청산하고 다시 평범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쿨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늘 한국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고 또 무거웠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 부랴부랴 짐을 싸 늦지 않게 공항으로 출발했다. 우버에서 바라보는 뉴욕의 풍경은 역시나 쿨하지 못하고 질척이는 이별을 하기에 좋았다. 이곳에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둥 느끼한 말들을 가감 없이 sns에 남겼다.


공항에 내려 출국 절차를 밟기 위해 내가 예약한 항공사의 티켓 창구를 찾아갔다. B창구였다. 지금쯤이면 이미 길게 줄이 늘어져있어야 정상인데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시계를 보니 탑승시간이 1시간 가랑 남은 상태였다.

 

‘여기가 아닌가’

자세히 보고 오래 봐도 B였다.


'이상한데...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공항에서 제시간에 떠나야 할 비행기가 뜨지 못하고 연착되는 일은 빈번하게 연출되는 상황이었으므로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조금 연착되나 보다 했다. 그때 더 의심했어야 했는데. 내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적당한 의자를 찾아 앉았다. 5분, 10분 차분히 기다려봤지만 내가 타야 할 비행기가 연착되었다는 안내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초조함이 몰려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5분만 더 기다려보자, 5분만, 다시 5분만. ‘아닐 거야’라는 혼잣말만 되풀이하면서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30분이 되도록 핸드폰만 쳐다봤다.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난 이미 이때부터 멘붕상태였던 거다. 비행기를 놓쳤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누가 봐도 의심할 만한 그 상황에서 현실을 요리조리 도피하며 ‘아닐 거야’라는 말만 하고 있었는지도. 그 낯선 땅 위에서 비행기를 놓쳐버리는 악몽 같은 상황과 대면할 자신이 없었는지 누가 알 일인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안 하면 이상했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2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나의 허접한 영어회화 실력을 창의적인 추측과 인내심으로 들어줄 만큼 ‘착하고 똑똑해 보이는’ 직원을 재빠르게 탐색했다. 검은색 곱슬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는 여자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근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 더듬더듬 물었다. (사실 구글 번역기 돌려서 외웠다)


'혹시 내 티켓을 확인해 줄 수 있겠니?'


그녀는 내가 내민 e-티켓과 보딩판을 두어 번 번갈아봤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탄식을 내뱉었고 입을 열었다.


'넌 비행기를 놓쳤어. 이미 비행기가 떠난 지 12시간이나 지났는 걸.'


지금 이 순간, 우리 둘을 감싸고 있는 이 쎄한 공기. 저 여자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귀에 선명히 박힌 already란 단어. 영어는 못하지만 자다가 들어도 비행기를 놓쳤다는 뉘앙스였다. 귀를 의심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미안한데 한 번만 다시 말해줄래?’

‘비행기는 이미 떠났어. 유감스럽지만 넌 지금 비행기를 놓쳤어.’


의심이 현실이 된 순간, 꾹꾹 눌러뒀던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킨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만화처럼 머릿속이 새 하얘지더니 뒷목이 뻐근해져 왔다. 온몸의 세포가 목덜미를 지나 안면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지구에 이토록 민망해진 내 눈 코 입과 이 한 장 짜리 E-티켓만 달랑 남겨진 기분이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열흘을 꼬박 낭만으로 그려놓은 뉴욕 여행에 검은색 물감을 가차 없이 쏟아부은 기분이었다. 망했단 거다. 그야말로 멘붕상태가 되어버린 나를 보고 있던 직원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 티켓은 어제 새벽 1시 20분 출발하는 비행기였어. 그리고 지금은 오후 한 시지. 아마 넌 오늘 오후 1시 2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라고 착각을 한 것 같아. 혹시 다음 비행기에 자리가 남아있다면 수수료 없이 탈 수 있도록 도와줄게. 그 대신 오후 9시가 될 때까지 확신할 수 없어. 8시간 뒤에 다시 이곳으로 와. 그때 여부를 알려줄게.'


맙소사. 오전과 오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다니. 비행기는 새벽에 떠났고 나는 무려 12시간이나 지나서야 비행기를 타겠다고 공항에 온 것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말도 안통하는 이 곳에서 국제 미아가 되는 건가?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온갖 근거 없는 두려움이 나의 목을 조여왔다. 허공을 채우던 공항의 분주한 말소리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해괴한 잡음이 되어 내게로 쏟아졌다.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공항의 지붕은 거대했고 나는 한없이 작았다. 나만 빼고 모든 게 같은 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두 손이 떨리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거나 오줌을 싸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어떡하지. 침착하자. 침착하자. 차근히 생각해보자. 최악의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는 비행기 표를 내 돈 주고 다시 끊는 것. 고작 해봐야 돈 백만 원이 걸린 문제다. 정말 국제 미아가 돼서 뉴욕 길바닥에 나앉는 것도 아니고 거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누가 공항에서 쫓아내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어쨌든 집에는 갈 수 있다. 그래.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지. 내일도 못 가면? 모래 가면 된다. 나는 차분히 상황을 응시했고 그제야 고장 난 생각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껍질을 벗겨내면 벗겨낼수록 두려움은 정체를 드러냈다. 불안의 구렁텅이 속으로 나를 끊임없이 빠트리던 두려움의 궁극은 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소설일 뿐이었다. 난 굶어 죽지도, 길바닥에 나앉지도, 국제 미아가 되지도, 한국에 못 돌아가지도 않았다. 단지 막연할 뿐이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불안함을 올바로 응시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가는 동안에 내 마음엔 평정심이 찾아왔다. 차근히 이 상황을 가족에게 알리고 편한 의자를 찾았다. 적어도 8시간 동안은 엉덩이 아프지 않게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최대한 많이 구경할 수 있는 경치 좋고 편한 곳으로.


2인용 테이블에 휴대폰 충전기까지 설치되어 있는 vip석을 찾았다. 휴대폰에선 걱정이 가득한 엄마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나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무서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 사건은 고작 해봐야 돈 100만 원짜리 일이었으니까. 내 인생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콩알만 한 에피소드에 불과했으니까. 아니 오히려 좋다. 여행은 어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마치 영웅담처럼 들려줄 만한 쏠쏠한 이야깃거리가 생겼으니.


안전하게 자리 안쪽으로 케리어를 넣어두고 이어폰을 꺼냈다. 뉴욕을 여행하는 내내 흥얼거렸던 ed sheeran의 newyork이 또다시 흘러나왔다. 여행 동안 못 다 읽은 책을 꺼내어 읽다가 밀린 일기가 생각나 다이어리를 꺼내 쓰기도 했다. 휴대폰에 저장된 여행 사진을 정리하면서 추억이 돼버린 시간들을 더듬었다. 망쳤다고 생각했던 뉴욕 여행에 어느새 햇살이 쏟아졌다. 그토록 질척이기 좋은 귀국하는 날, 승무원의 안내를 기다리는 8시간 동안 또 다른 공항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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