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피디 Jun 20. 2020

꿈을 잃지 않고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삶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역동적인 태도

작은 월간지의 인문 사회부 기자로 일을 할 때였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가량이 지났을 때 내 앞으로 인터뷰가 하나 들어왔었다. 대상은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 개발로 당시 언론에 자주 소개될 만큼 꽤나 핫했던 스타트업 대표였다. 입사 한 달 차의 신입사원에게 맡긴 업무라고 하기엔 꽤 비중이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평소보다 2배, 3배 더 성심을 다해 질문을 준비해야 했다. 비슷한 카테고리의 기사를 모조리 모아 분석하고 질문을 뽑으며 며칠을 보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난 그는 내가 예상했던 '대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잘 나가는 스타트업 대표 이미지와는 다르게 소박해 보이는 옷차림에 수더분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을 어딘가 모르게 편안하게 해주는 그의 외모에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으나 인터뷰를 할 생각만 하면 속은 여전히 바짝바짝 말랐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앞에 놓인 찻잔을 자꾸만 들었다 놨다 했다. 짧은 인사와 몇 마디의 형식적인 대화가 오고 간 후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고심 끝에 뽑아온 질문들이 물 흐르듯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한두 번 듣는 질문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술술 대답했다. 어떤 질문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는 듯 허공을 응시하며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가 기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속에선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질문공세에도 그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인터뷰가 체질인 것처럼 대답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준비해 간 질문이 두어 개쯤 남았을 무렵이 되어서야 긴장이 풀린 나는 시시콜콜한 농담도 던지며 여유를 부렸다.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었다. 한결 가벼운 몸짓과 편안한 목소리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대답은 예기치 못한 역질문이었다.


"기자님은 꿈이 뭐예요?"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의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대본에도 없었고 예상 변수에도 없는 질문이었다. 꿈이 뭐냐는 그 맑고 본질적인 물음은 '되는대로 살고 있던' 나의 정곡을 때렸다. 대학 입학 원서의 빈칸을 채울 때나 고민하던 문제였다. 허리를 다시 고쳐 세웠다. 허공을 열심히 째려봤으나 마땅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생각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제 꿈은 돈 많은 백수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꿎은 찻잔만 무늬가 닳도록 만지작 거리다가,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게 꿈'이라고 힙한 척을 했다.


그의 질문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까지 집요하게 쫓아왔다.


'그러게. 내 꿈이 뭐였더라'




방송국에서 피디로 일하고 있는 나의 오랜 선배는 택시기사가 꿈이라고 했다.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가치관을 공유할 때마다 본인이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이 일을 못하게 되면, 택시 운전을 하면서 만나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내 나이는 고작 스물둘이었다. 어린 내가 이해하기로는 조금 '없어 보이는' 꿈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60평대 아파트를 산다거나 외제차를 구입하고 싶다'는 등의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을 테다.


누구나 꿈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1년 안에 천만 원 모으기라던가 20대에 세계일주 하기 같은 거창 한 것일 수도 있다. 좋은 사람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일 수도 있다. 모솔 탈출 일수도 있다. 모두 다른 크기로 모두 다른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꿈은 사람의 무뎌진 영혼을 깨우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


 꿈은 꿈이어서 꿈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 행위가 무의미한 일일 수는 없다.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모를뿐더러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노력한 모든 시간만큼은 선명히 남기 때문이다. 소망하고 애써왔던 모든 순간들을 어찌 헛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가. 꿈을 이루기 위해 걸어온 걸음, 얻고자 노력했던 모든 무형의 기운, 온갖 뇌의 화학적 작용, 어떤 다짐 그리고 한 존재의 좌절과 환희와 열정의 몸부림. 이 모든 게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의 본능적인 움직임이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꿈을 꾼다는 것, 어쩌면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삶을 향한 애정이 아닌가. 주어진 생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이자 노력이 아닌가.


개그맨 유세윤이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코미디언이 꿈이었는데 코미디언이 됐다. (중략) 내가 궁금해하던 모든 것을 알게 될 때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라고 말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살아낼수록 실감한다. 크고 작은 꿈을 꾸고 키우며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그 꿈에 도달했을 때 우린 유감스럽게도 공허함을 느낀다. 간절히 소망하던 것을 이루고야 말았을 때, 성취감과 동시에 꿈이 사라지는 그 기분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우리는 자꾸만 꿈을 만들고 꿈을 이루기를 반복한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꿈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기' 라던가, '하루에 감사한 일 3가지 만들기' 등의 꿈같지도 않은 꿈을 꿈이라 부르면서 말이다. 그리고 1년 단위로, 10년 단위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동그라미와 엑스를 표시를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크고 작은 꿈을 꾸고 이루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나는 역동적인 삶의 풍성함을 느낀다. 그 본능적인 움직임이 삶에 대한 가장 순수한 태도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예고 없이 어느 날 누가 내게 꿈을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고 싶다.

"꿈을 잃지 않고 사는 게 제 꿈입니다."


끊임없이 꿈을 꾸며 산다.


이전 03화 자취방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