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와 연륜의 차이
신혼집을 구할 당시 두 가지의 선택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조금 좁아도 깨끗한 신축 빌라냐, 조금 오래되었지만 넓은 아파트냐를 두고 말이다. 나는 좁아도 상관없으니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는 신축빌라에 신혼집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조금 오래되었더라도 아파트가 살기에 좋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아 하니 전세금도 적지 않은 차이로 아파트가 더 저렴했고, 재활용이며 음식물 쓰레기며 사사로운 것까지 아파트에서 관리해주니 살다 보면 훨씬 편할 것이라고 했다. 듣자 하니 그럴듯했다. 우린 오래된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30년이나 된 서울의 복도식 아파트였다.
언뜻 봐도 노후된 티가 팍팍 나는 이 복도식 아파트에 정을 붙이기란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예쁜 신혼집을 꾸미리라 다짐하던 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왕이면 세련되고 깨끗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퇴근해서 귀가하는 순간마다 이 구닥다리 복도식 아파트가 영 내키지 않았다. 나는 집 내부 인테리어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마음에 쏙 드는 것들로만 채워진 우리의 공간은 두어 달이 지난 후에야 제법 신혼집다운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나른한 주말 오전, 거실 한편에 예쁜 빛이 들었다. 모처럼 음악을 켜고 새로 산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내렸다. 아침잠에 푹 빠진 남편은 내 소란스러운 인기척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음악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새하얀 거실 커튼을 활짝 재치니 더 밝은 빛이 거실로 쏟아졌다. 창문을 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의 달큼한 풀내음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만히 만끽하고 있는 찰나, 문득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에 기대어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보는 지금 이 순간이 말이다. 그제야 눈 앞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12층에서 내려다본 오래된 단지는 온통 초록이었다. 웅장한 나무들이 아파트 8층 높이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보잘것없는 구닥다리 복도식 아파트라고만 여겼던 이 곳에서 묵직한 연륜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초록의 잎사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 오래된 곳에서 씩씩하게 자리를 잡고 서있는 나무를 보니, 꼭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닥다리로 취급되는 것과 연륜으로 인정받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초록으로 물든 나무가 내면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를 일이다. 초록의 나무들은 여유가 있었고 향기가 났으며 보는 이를 묵직한 안정감으로 몰입시켰다. 그 웅장한 나무들 앞에서 신축 빌라 따위는 더 이상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앞에 펼쳐진 이 30년의 연륜이, 흔적이, 한결같이 지키고 서 있는 그 나무의 허리가 더 멋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꽃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부담 없이 편안한 나무처럼 늙고 싶다. 사시사철 때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줄 아는 나무처럼. 자꾸만 눈이 갈 만큼 빼어나진 않지만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은 나무처럼. 이 구닥다리식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일순간 연륜이 묻어나는 곳으로 만들어주는 이 초록의 나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