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그리고 이른바 호러 소설의 '뒷심'에 대하여

by 고기왕

‘긴키 지방의 어떤 장소에 대하여(이하 ‘긴키’로 줄임)’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양식을 빌린 호러 소설입니다. 주인공 ‘세스지’와 동료 미스터리 잡지 편집자 ‘오자와’가 괴담을 수집해 나가던 중에 기묘할 정도로 긴키 지방의 어떤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괴담의 양상을 취재해나가는 과정이 소설의 줄기를 이룹니다. 당연히 수집한 괴담들은 독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됩니다. 두 인물은 1984년부터 2022년까지의 괴담이 어렴풋하게 어떤 동일한 대상 혹은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만, 그 이상 알기는 어려워지자 오자와가 직접 그 장소를 향해 가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줄입니다만, 많은 공포물이 그랬듯이 이 소설도 어떤 뚜렷한 원인과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 모호한 지점에서 마무리됩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오자와가 수집해서 보여주는 괴담들을 직접 읽고, 그 괴담들의 연관성을 밝혀나가는 과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수집한 괴담’이므로 괴담이 알려진 시기에 따라 TV방송 영상(을 설명하는 글)부터 인터넷 게시판 댓글까지 다양한 텍스트의 양식이 혼란스럽게 제시됩니다만, 그 양식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괴기함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매력적인 부분은 그런 다채로운 양식이 공통적인 두려움을 자극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오 이건 새로운 이야기군?’하고 보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 이거 아까 읽은 그거랑 살짝 비슷한데? 무슨 관계가 있는 거 아닌가?’로 이어지고, 마침내 ‘어 이거 분명히 그거랑 관계가 있어!’라는 확신을 제공합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어진 괴담들이 점점 한 곳으로 모이는데, 그 과정에서 때로는 오자와나 세스지보다 한발 앞서서 괴담의 배경을 짐작해볼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이 괴담 간의 관계와 괴담이 생긴 이유를 밝히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무서운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점점 확실해져가는 기분으로 두근두근 책장을 넘겨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영화화되어 지금 개봉 중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소설과 영화 모두 ‘결말이 좀 아쉽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비단 이 소설뿐만 아니라, 이른바 ‘호러물’에는 모두 비슷한 평이 따라붙곤 합니다. 결말이 좀 허무했다, 결말이 말이 되지 않는다, 결말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결말에서 해결된 게 없어 답답하다, 그리고 대표적으로는 ‘뒷심이 부족하다’와 같은 감상들을 많이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서두에서 소설이 ‘모호하게 마무리된다’고 썼는데, 사실 이걸 비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호러물은 본래 모호할 수밖에 없는데, 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희미한 경계에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소설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에서, 주인공 와타세 형사는 “공포는 미지와 무방비에서 온다”고 얘기합니다.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언가를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어둡고 긴 골목이 무서운 건 무엇이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고, 치과가 무서운 것도 얼마나 아플지 혹은 얼마나 비쌀지를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알게 되면 이제 두려움을 극복할 의지가 생깁니다. 안다면 싸울 수 있고, 도망갈 수 있고, 적어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골목의 중간쯤 갔을 때 유령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중간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두려워하는 대신 죽을 힘을 다해 뛸 각오를 하게 됩니다. 치과에서 ‘이제 제일 힘든 건 지나갔어요’라는 말에 안심이 되는 건, 이 정도가 제일 고통스럽다는 걸 알고 나면 이제 남은 고통의 양이야 어쨌든 견딜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여, 미지에서 ‘호러’가 발생하므로 호러 소설의 결말은 호러와 소설 사이에서 딜레마에 처합니다. 예를 들어 온다 리쿠의 소설 ‘여섯 번째 사요코’는 신비로운 전학생에 대한 기괴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지만, 결말부에서 그 기괴함을 전부 설명해주는 바람에 결국 평범한 이야기로 끝납니다. 이런 명쾌한 설명이 필요한 건 추리물입니다. 호러물에서는 결국 설명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 설명될 수 없음-모름-에서 공포가 기원하니까요. 그러나 반대로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야기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공포 소설과 영화들이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스즈키 코지의 소설 ‘링’을 굉장히 무섭게 읽었고, 또 그래서 좋아합니다만 저주의 비디오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부터는 무서워하지 않고 책장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링2와 링3으로 이어지면서 장르적으로 크게 전환합니다. 호러-미스터리물에서 SF물이 되죠. 그게 별로라는 얘기는 아니고, 또 2편과 3편도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저주의 비디오의 원인과 결과가 밝혀진 시점부터는 그 소재로 더는 무섭게 쓸 수 없었기 때문인 것도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도 좋은 예입니다. 전반부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는 오컬트물로 진행되다가 중간부터 거대한 괴수물로 바뀌는데, 이 전환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아서 아쉽다는 감상이 많았었죠. 하여튼 링의 ‘비디오’와 파묘의 ‘무덤에서 나온 험한 것’의 정체를 알게 된 다음부터의 재미는 공포와는 좀 다른 방향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끝까지 독자에게 두려움을 남기려면 모든 것을 말해선 안 되고, 얼마나 모호하게 끝낼 것인가 즉 해명되지 않은 뒤끝을 얼마나 보여줄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다시 ‘긴키’ 얘기로 돌아오면 의외로 이 소설의 결말은 공포물의 정석대로 갑니다. 공포의 원천인 ‘미지’에 대해 이야기 내적으로는 알 수 있으리라는 전망 없이, 그러나 이야기 외적으로는 알아야 한다는 필연성을 남기는 것이지요. 독자에게는 그 모호한 간극이 신비와 두려움으로 남을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이 책을 즐겁게 읽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세히 결말에 대한 얘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소설의 결말을 읽고 드는 생각은 ‘결국 이 얘기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마지막에 아주 조금, 분명하게 이야기의 실체를 보여 줍니다만 이 장르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 일부에서 전체를 그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이 글들은 책으로 엮어 내는 것보다 실제 연재 당시처럼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올 때 더 무서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포물은 역사가 깊은 장르이면서 팬층도 두텁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가 다양한 폭력으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않은, 불안하고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공포’라는 반응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불쾌한 감정입니다. 그럼에도 어째서 이 공포를 굳이 소설이나 영화로 체험하려드는 것일까요. 노엘 캐럴은 이를 ‘쾌락과 혐오의 양가성’이라고 설명합니다. 간접 경험의 세계에서 공포를 경험하면서, 그 세계와 ‘내’가 분리되어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함이라는 얘기지요. ‘긴키’는 이 분리된 확신을 흔들려는 시도입니다. 새로운 시도도 아니고 이 작품이 거기에서 뚜렷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이 소설은 책 속의 미지가 지금 여기, 책 밖에도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고, 거기서 오는 두려움에 숨죽이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끝)




※ 공들여 로컬라이즈하면 더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긴키 지방은 흔히 경상도에 비유되곤 하니, ‘경상남도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정도면 어떨지… 아마도 일본의 독자들은 제각기 갖고 있는 긴키 지방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더 구체적인 두려움을 느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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