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큰 아이는 뒤늦게 치과대학에 가고 싶어 원서를 냈다. 다행히도 여러 대학에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덕분에 덩달아 나의 스케줄도 분주해졌다.
학교마다 인터뷰 방식이 달랐다. 간단하게 30분에서 1시간으로 끝나는 학교도 있지만 온종일 인터뷰하는 학교도 있았다. 큰 아이는 인터뷰 시간이 짧아도 타주에 있는 학교는 비행기를 타고 혼자 다녀와야 했고, 약간 멀어도 비행기 시간이 애매하면 나나 남편이 라이드를 했다.
지난주였다.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는 한 대학에서 인터뷰가 아침 7시 반부터 오후 5시 45분까지 잡혀있었다. 오랜만에 우리 가족은 버지니아로 다 같이 출동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아들의 스케줄 조정 덕분이었다. 집으로부터 약 3시간 거리라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했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지 몇 시간 잠을 못 잔듯한 얼굴이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운전석에 앉는 아들을 보니 약간 불안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앞자리에는 두 남자, 남편과 아들이, 뒷자리에는 나와 딸이! 다른 집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도 왠지 어색하고 낯설었다.
이른 새벽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예상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하였다. 아직도 밖은 어두컴컴했지만 학교 근처이어서인지 파킹 할 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인터뷰 시간을 기다리며 계속 주면을 돌고 또 돌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 시간이 되어 큰 아이를 내려주고 커피가 그리워 근처에 있는 커피숍을 검색했다. 5분 거리에 있는 ‘Best Coffee Shop’이라고 소개된 ‘IRONCLAD Coffee Roasters’으로 향했다. 큰 아이가 챙겨준 베이글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려 했지만,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한국의 멋진 카페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흘러나오는 올드 팝송 음악 또한 추억 속으로 빠지는 듯하여 더 듣고 싶었다. 엄마의 마음을 읽었는지 시중보다 가격이 센 편인 빵과 커피를 평소 절약정신이 강한 아들이 거하게 쐈다. 처음 먹어보는 특이한 건강 빵들과 직접 로스팅해 내려주는 커피 맛은 일품이었다. 알고 보니 스페셜티 커피 협회(Specialty Coffee Association)의 기준에 따라 '스페셜티 등급(Specialty Grade)'을 받은 훌륭한 커피였다.
또한 이 커피숍은 소방서의 내부를 리모델링한 것으로서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 본사를 둔 유명한 Ironclad Coffee Roasters의 두 번째 커피 소매점이었다. 그저 커피가 마시고 싶어 들어간 첫 번째 장소였지만 우리들의 가족여행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근처 가볼 만한 명소들이 10시부터 입장이라 1시간이나 머무르며 담소를 나누며 피로를 풀었다.
시간이 되어 15분 거리에 있는 Maymont Japanese Garden으로 향했다. 울긋불긋 화려하게 옷을 입은 단풍들은 우리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주었다. 눈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마치 소장하고픈 그림 같았다.
동물원도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이 말, 블랙 곰, 소, 염소, 독수리, 매, 부엉이 등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들 문제들이 있어 바깥세상에서 살 수가 없어 이곳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동물들이었다. 얼마 전 열심히 낭독한 루리 작가님의 <긴긴밤>에서 동물원에 있게 된 지구상에 남은 한 마리 코뿔소 '노든'을 떠올렸다.
특히 두 마리의 독수리는 잊을 수가 없다. 독수리들을 보자마자 왜 윗부분 철조망이 없는지 궁금했다. 관리인은 답했다. 한 마리는 오른쪽 날개를, 다른 한 마리는 왼쪽 날개를 쓸 수가 없어 날아갈 수 없어 철조망이 필요 없다고. 그렇기에 그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지낸다고. 두 마리 독수리들의 사연이 가슴 짠하게 밀려왔다.
두 시간 반을 걸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가을 나들이에 밀린 운동까지 일거양득이었다.
정원을 다 둘러보고 파킹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예상보다 30분 이상을 더 걸었다. 씩씩거리며 앞서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극히 대조적이었다. 묵묵히 따라오던 아들이 갑자기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기 시작했고, 한 늙은 아재는 그 뒤를 좇고 있었다. 젊은 날 그리도 좋았던 풍채(결혼 당시 허리 38인치)는 어디로 갔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꾸부정한 모습에 앙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남편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그 당시는 뭐에 씌었는지 뚱해 보이지도 않았고 마냥 좋았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는 그 아재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있다.
차에 타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비였다. 몸의 열기가 싹 가시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