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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독가 한희정 Apr 09. 2022

어느 이른 봄날 아침에

어느 이른 봄날 아침에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오늘 아침 눈을 뜨니 7시 반이었다. 평상시보다 두 시간이나 늦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런데도 몸과 마음이 무겁게 느껴져 게을러지고 싶은 날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만 있고 싶었다. 이른바 3월! 봄을 타는 건가?


목요일 글쓰기 모임이 있다는 알람이 울렸다. 


바로 일어나기가 싫어 시간을 흘긋흘긋 보면서,  이곳저곳 유튜브 쇼핑을 하며, 몸을 뒤척이며 깨우고 있었다. 순간 ‘프랑스 파리의 온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린 한국인’이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느 한 유튜버가 운영하는 ‘미처 몰랐던 이야기’라는 채널이었다. 세계적으로 너무 유명해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coloratura soprano) ‘조수미’의 이야기였다. 


2006년 프랑스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국제무대 데뷔 20주년 기념 특별 무대가 있었는데, 그날 연주 레퍼토리를 다 부르고 난 후  마지막 앙코르 곡을 부르기 전 관객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제 아버지를 위해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한국에서 장례식이 있었죠. 전 이곳에서 여러분들을 위해 저를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생각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공연은 아버지께 바치고자 합니다. 아버지께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불러드리고 싶어요.”



                                    Franz Schubdert의 아베 마리아 <Ave Maria>  


                                        아베 마리아 성모 마리아여

                                        제 간청을 들어주소서

                                        험하고 거친 이 바위에서

                                        당신께 나의 기도로 간청드립니다.

                                        아침까지 우리가 평안히 잠들기를

                                        비록 우리가 여전히 괴로울지라도

                                        보라, 성모 마리아의 보살핌을

                                        성모여,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아베 마리아

                                        은총이 가득하신 아베 마리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오랜만에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Ave Maria)'를 들었다. 장례식에도 못 가고 연주를 하고 있는 그녀의 안타까운 심정과 영혼이 깃든 노래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찐한 감동과 전율로 전해왔다. 오늘따라 아름다운 선율의 흐름이 더욱더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아마 열 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그냥 맘껏 울어버리기로 했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는데도 눈물은 그치질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꽉 움켜쥐고 있던 뭔가를 내려놓는 듯한 형용할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20년 전 3월, 아버지가 한국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나갈 수가 없었다. 당일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다음날 나가도 장례식은 이미 끝나버리기에, 그리고 우리 집 경제와 직결된 ‘일’때문에 쉽게 포기했었다. 그 당시 홈스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인 문제로 며칠씩 문을 닫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믈론 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더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레슨을 하며 일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많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적 오토바이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포도밭에 가시던 아빠, 경주 수학여행 때 몰래 오셔서 친구들에게 창피함을 느끼게 한 아빠, 대학 입학 후 부모님의 과잉보호로부터 벗어나고파 가입한 산악반 서클에서의  첫 등반 '지리산'까지 오셔서 교수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신 아빠, 아침마다 내 차를 닦아 주시며 광을 내주시고 "좋은 하루!"라고 말씀하시며 활짝 웃으시던 아빠, 갓 운전면허를 땄을 때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운전 연습을 시켜주시던 아빠, 철없이 운전대를 잡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전국일주를 떠났건만 부여에서 사고를 당해 벌벌 떨고 있는 나에게 달려와준 아빠, 그리고 서울 집까지 운전을 하게 한 아빠, 피아노 잘 치는 우리 딸이라고 늘 자랑하시던 아빠, 아들처럼 사위를 사랑하셨던 아빠, 결혼식 때 남몰래 눈물을 닦고 계시던 아빠....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나는 아버지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의 삶에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저 낳아주셨다는 이유로. 그저 딸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들어 아주 조금씩 마음을 열어보려고도 했지만, 편안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이미 응어리진 나의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수 하나를 꼬투리 삼아 아버지는 당연히 나의 벌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고까지 여긴 사춘기 시절도 있었다. 아버지는 늘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셨지만 나는 나를 아프게 한 미안함으로 받아들였을 뿐, 온전한 마음으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은 하지 못했다. 가끔은 맘 속에서 웅얼거릴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의 고집 때문에 더 깊은 상처로 내 안에 비축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아버지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한 것은 소천하신 후 5년 뒤 한국에 있는 아버지 묘소 앞에서였다. 


“너무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요.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이제야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빠 딸은 지독히 나밖에 몰랐네요. 너무 내 생각만 했어요. 아빠... 정말 미안해요.”


그렇지만 그때도 오늘처럼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 후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칠 줄 모르던 눈물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 아버지에게로 향한 미움의 잔 찌꺼기가 남아있음을, 반면 잘해드리지 못해 뼈저리게 후회하는 아픔도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려준다. 옹졸한 나였기에 이제 ‘용서’란 단어를 쓸 자격조차 없다.  ‘용서’에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용서란 용서할 타이밍을 놓치면 오히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오늘 아침 ‘아베 마리아’를 들으며 한바탕 실컷 울고 나니 옆에 계시진 않지만 감히 아버지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늘 아빠에게 찡그리기만 했던 딸!

날마다 웃으며 행복하게 살고자 해요.

그리고 지금 여기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늘 밝은 모습을 보여주며, 잘 살아가고자 해요. 

많이 늦었지만, 맘 속에서만 맴돌던 말 이제야 전해봅니다.

많이 사랑했습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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