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있다

by 한희정

제주 여행의 목적은 무계획이 계획이었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순간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얼떨결에 마주치는 것을 맞이하기로 한 여행이었다.



한 사람을 만났다.


날마다 책으로 안부를 물어주는 따뜻한 사람!

이야기를 나누며 나에게 필요한 책 한 권을 권해주는 사람!

여러 다양한 독서모임으로 사람들에게 책을 전하는 사람!

역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은 열렸음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 사람!

독립서점을 운영하면서 지루할 때도 있을 텐데, 지칠 때도 있을 텐데, 그 삶을 값지게 즐기는 사람!

책으로 꿈도 키우는 사람!

날마다 신창리 포구의 하늘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

가끔 안부를 물으며 소식을 전하고 픈 동생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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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무명서점 정원경 대표다.


무명서점 북스테이는 멋진 제주여행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정원경 대표가 권하는 낭독독서모임에 참여했다. 이주영 작가님의 진행으로 김연수 작가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윤독했다. 책을 가까이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 책도, 작가 이름도 사실 다 낯설다. 낭독회에서 김연수 작가의 작품도 처음 만났고, 이주영 작가도, 김노노 작가도 처음 만났다. (모임이 끝나고 검색을 해보니 책도 많이 내시고 유명하신 분들! 몰라뵜네요~)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고 놀랐다. 내가 알고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통념이 깨졌다. 에세이적인, 자기 계발적 소설이었다. 소설인데도 줄 긋고 싶은 구절들이 많았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의 기억력이 예쁘진 않지만 순간순간 마음을 때리는 문장들이 많은 소설이었다. 이제부터는 제일 먼저 제쳤던 서점의 소설 코너로도 눈길이 갈 것 같다. 낭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후 찍은 발사진 또한 언제라도 웃을 수 있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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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무명서점의 분점인 <책은 선물>에서 서점지기를 했다. 언젠가 막연히 조그마한 북카페를 여는 것이 로망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서점지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어떤 책을 팔게 될지 설레었다.


서점에 도착하자마자 대표님의 빠른 설명에 집중했다. 문은 어떻게 열고 닫는지, POS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책의 배치와 가격 등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이었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결국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천정에 있는 불 스위치를 못 찾아 엄청 헤맸다는!


첫 손님이 들어왔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 손님이 뜸할 거라 했는데 그것도 두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 권의 책도 바로 계산 테이블로 가져왔다. (아마 나의 느낌이리라!) 그런데 한 권의 책을 아무리 보아도 있어야 할 곳에 가격이 보이지 않아 슬슬 당황이 되었다. 대표님과 연락이 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한 후 책 값을 받을 수 있었다. 너무도 익숙지 않은 나의 모습에 미소로 기다려주는 고마운 손님이었다.


첫 손님이 나가자마자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내가 서점지기 한 날이 장날인가? 했다. 아니 장날이길 바랐다. 제주 토박이라고 말하는 손님, 낭독회를 위해 책을 받으러 온 손님, 먼 독일에서 35년 만에 제주에 온 손님, 인터넷에서 본 귀여운 책갈피를 사기 위해 왔다는 손님.. 다 기억에 남는다.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고 홀로 서점을 독차지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생겼다. 그제야 책들이 어떻게 큐레이션 되어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책의 장르를 붙여놓지 않은 책방이다. 나 역시 책 선정에 편협한 사람이라 완전 공감이다. 덕분에 선반 한 칸 한 칸 어떤 책들이 큐레이션이 되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흥미로웠다. 선반에 꽂힌 책 한 권 한 권이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듯했다. 점점 서점지기에 익숙해지는 듯하자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주어진 5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모른다. 오늘 나는 왜 서점지기를 하게 되었는지.

그냥 흐름에 맡겼고 마음에 맡겼다.

그러나

절로 미소 지어지는 하루였다.

날씨 또한 선물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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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 <책은 선물> 주변 골목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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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으로 가는 길에 찍은 신창리포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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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뒷모습 찍었습니다~ 하하.



- 서점지기 하면서 잠깐 읽은 책 요조 작가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버스 안에서 광화문을 바라볼 때, 한강에서 자전거를 탈 때, 합정역 계단을 내려가며 델리만쥬 냄새를 맡을 때, 연희동 길을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날 때, 한산한 오후 좋아하는 작은 극장으로 향하는 그늘진 골목 위에서, 꽉 막힌 강변북로 위에서 동시에 파밧하고 켜지는 가로등을 볼 때, 부모님이 사시는 도봉동에 갈 때마다 없어지지 않고 차분히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오래된 호프집 간판을 보면서, 이 도시는 정말 아름답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그저 낯섦이 유발하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30년 넘도록 살면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지루하게만 여겨졌던 도시가 이제 와서 조금 낯설어졌다고 새삼스럽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인생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처럼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렇게...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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