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쾅! 소리가 났다. 세찬 비바람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휴대폰에서는 계속 집중호우 예보 알람이 울려댔다. 태풍급 강풍에 폭우가 내려 곳곳에 침수지역이 있다고 뉴스는 전했다. 7월에 들어서면서 거의 매일 비가 온 듯하다.
비피해로 대피하는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모처럼 나는 집에서 뒹굴거리며 쉴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반찬을 만들고, 빨래를 하고, 조카의 식사를 챙기며 분주히 움직였다. 조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행복이까지 서머컷을 시켰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동생은 몸이 찌뿌둥하다고 동네에 있는 불한증막 사우나에 가자고 했다. 사실 나는 대중목욕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뜨거운 것도 싫어하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것도 싫어하고 어렸을 적 엄마와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은 흔쾌히 동생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차를 타자마자 동생의 걱정은 시작되었다. "비가 와서 사람들이 많을 지도 몰라. 주차할 곳이 없으면 어떡하지?"등.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나는 답했다. "내가 가니까 사람들 없을 거야. 비가 오니까 없을 거야. 그리고 주차할 곳도 있을 거야. 가보고 아니면 그냥 오면 되지."
신기하게도 나의 말대로 파킹할 자리도 있었고 목욕탕 안은 손님이 이상하리 만큼 없었다. 불가마, 히말라야 소금방, 수정방, 아이스 방 다양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현대식 한증막은 우리들만의 한가한 쉼터였다. 역시나 나는, 심장마비 일어난다고 경고하는 동생의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에서 불이나 냉탕을 들락날락 거리며 몇 시간을 버텼다. 하하.
어린 시절 나는 일요일을 무척 싫어했다. 강제로 엄마에게 이끌려 집 근처에 있는 불한증막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뜨겁게 달궈진 진흙 동굴 속으로 들어가 마치 시체처럼 가마니 위에 드러누워 또 하나의 다른 가마니를 덮고 누워있었다. 엄마도 들락날락하며 즐기는 듯 보였다. 가끔 엄마의 강요에 못 이겨 함께 들어가곤 했지만 숨을 쉴 수 없어 재빨리 빠져나오고 말았다. 동생들과 나는 시원한 한증막 밖에서 구운 계란과 얼음이 동동 떠있는 시원한 식혜를 먹으며 엄마를 늘 기다려야 했다. 최소한 시곗바늘이 네 번은 돌아가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 번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걱정하던 아빠가 경찰서에 신고를 하여 경찰이 방문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어린 4남매와 함께한 목욕시간이 그 정도는 걸렸을 것 같기도 하다. 그땐 나만 생각했었기에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엄마에게 화를 냈던 것 같기도 하다. 하하.
여전히 나는 한국의 사우나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한 시간이면 아주 족하다. 많은 사람들에겐 그곳이 쉼의 장소요 명상의 시간일 텐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의 몸은 뜨거운 온탕보다는 15도의 냉탕을 기억한다. 하하.
어쨌든 오랜만에 몸을 푸니 깊은 수면은 취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피부가 뽀송해진 것 같고 몸도 가벼워 좋았다.
만나는 한국사람들마다 피부가 좋은 이유가 한국의 사우나 문화에 있을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