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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Oct 17. 2021

억울함 발생 경로

이런 날에는 이런 향기

"억울해"라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잘 안 하던 말이다. 입 밖으로 끄집어내기 힘든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내가 찌질해 보여서. 요새는 장난처럼 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억울해!"


그래서일까? 요새 이 말은 웃음을 데리고 나온다. 억울하다면서 실실 웃는다. 미친 건 아니다. 그저 이 말이 나에게 소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주는 것일 뿐.

속에서 억울함이 막 생겨나려는 순간 "억울해"라고 말해버리면 기계에서 나사 하나가 톡 튀어나와 가동을 멈춰버리는 것 같다.

포사삭-

가볍게 분해되어버리는 것 같다.


억울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던 시절, 억울함을 생성해내는 기계는 오히려 더 가열차게 작동했다. 억울함의 발생 경로는 다양했다.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경로로 억울함이 만들어졌다. 발생 경로에 따라 그 마음의 강도와 크기도 달랐다.


억울함 랭킹 1위는 어떤 이별 과정 중에 생겨난 것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렇게 끝내자고 할 거면서 그렇게 잘해준 거야? 애초에 끝낼 생각이었으면 잘해주지 말았어야지. 너 정말 최악이야! 위선자. 그동안 그렇게 잘해준 게 다 가식이었던 거잖아. 진심이었다면 어떻게 그만하자고 할 수가 있어?"


나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말.

한동안 혼돈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 관계가 소중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그러면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뭐가 옳은 거야?

그 사람의 말에 갇힌 채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억울하다고 말할 걸.

지금 나의 마음.

나에게라도 말해줄 걸.

"이별을 삭제한 채 만나는 관계가 옳다고 말하는 저 사람의 말에 갇히지 마. 네가 이별을 먼저 말했다고 너의 모든 진심이 거짓이 되어버리는 건 아니잖아."


그때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억울함은 내 속에 그대로 남았다. 먼지가 뽀얗게 싸여 그게 무언지도 모른 채 살다가 바람이 휙 불어 먼지가 벗겨지는 날이면 억울한 마음이 나를 툭 건드렸다. 그래도 계속 모른 채 했다.

'꺼내기 싫어. 이젠 괜찮은데 굳이 널 꺼내서 내 마음을 들쑤시고 싶지 않아.'


하지만 버가못 향기는 그런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버가못 향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억울함을 말로 툭 뱉어버렸다.

'이상해. 끄집어내면 또 아플까 봐 꾹꾹 눌러놨는데 이 후련함은 뭐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찌질 해 보일까 봐 싫었는데 그건 그냥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그 사람의 말이 만든 감옥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냥 손으로 슬쩍 밀면 열리는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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