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변형, 변화, 끝, 치유, 봉사, 영성, 민감함, 비탄, 숨겨진 분노, 현실 도피
[사랑하는 로스 선생님께,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삶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어린이들은 죽어야만 하나요?
사랑을 담아, 더기
아주 짧은 동안만 피는 꽃도 있단다.
봄이 온 것을 알리고 희망이 있음을 알리는 꽃이기 때문에
모두로부터 사랑받는 꽃이란다.
그리고 그 꽃은 죽는단다.
하지만 그 꽃은 해야 할 일을 했단다.
(...)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몸은 벗어 버려도 좋아.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누에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란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영혼을 해방시켜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신의 정원으로 돌아간단다.
아름다운 한 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말이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생의 수레바퀴>
죽음을 앞둔 아이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주고받은 편지.
그녀는 죽음을 앞둔 아이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아이는 그녀에게 죽음에 대해 물었다.
만약 죽음을 앞둔 아이가 당신에게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죽음이 바로 앞에 당도하지 않았는데도 죽음이 이토록 두려운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일명 '죽음의 의사'이다. '죽음학'의 창시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어느 날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된 지도교수의 수업을 대신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있던 열여섯 살 소녀 린다를 수업에 초대한다.
"하필이면 왜 나예요? 하느님은 왜 내가 죽도록 정해놓았죠?"
이 용감한 소녀에 매료된 엘리자베스가 린다에게 제안을 한다.
"장래 의사가 될 학생들에게, 어머니에게 할 수 없었던 얘기를 실컷 해봐. 열여섯 살에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그들에게 가르쳐줘. 화가 나면 화를 내도 좋아. 어떤 말을 해도 좋아. 지금의 진실한 마음을 죄다 털어놓는 거야."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p.137
이렇게 그녀의 죽음학 수업은 시작되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금기가 아니었다. 죽음에 대해 말하기 두려워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다. 죽음은 남의 일이라고 여기는 우리들.
더 이상 죽음을 외면할 수 없게 된 이들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평생에 걸쳐 죽어가는 이들과 죽음에 대해 알렸지만 우리는 여전히 죽어가는 이들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다.
우리에게는 왜 이토록 '죽음'이라는 주제가 어려울까? '죽음'이라는 단어 조차 두려운 걸까? 얼마나 무섭길래 엘리베이터에 4층은 없고 F층만 있으며, 13일의 금요일은 공포영화의 제목이 되는 걸까?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일까? 죽음에 대한 경험은 죽은 자들의 몫인데,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경험에 대해 들려줄 수 없으니 말이다. 그것이 정말 고통스러운 것인지, 실은 그렇지 않은지, 죽음의 경험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죽음 이후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죽음은 변화를 상징하는 상징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바이올렛 컬러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죽음과 같은 변화.
어떤 변화는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가져다준다.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취업을 하고, 승진을 하고, 아이가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일상의 변화는 삶에 행복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어떤 변화는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과 아픔을 안겨준다. 갑작스러운 실직, 사랑하는 이의 죽음 혹은 이별, 건강의 상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경험은 '죽음'같은 고통을 안겨준다.
당신의 삶에는 이런 순간이 있었는가?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나 두려움을 수반한 변화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상실감이 너무 커서 한동안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적이 있는가? 큰 충격에 철퍼덕 주저앉아버리고 만 적이 있는가?
사람마다 이런 순간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순간일 수도 있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냥 그 경험을 통과해나가는 '나'만 있을 뿐. 경험하는 '나'에게는 그 순간 나의 느낌이 진실이다. 오히려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의 느낌이 틀리다는 딱지를 붙일 때 우리는 자신의 진실에서 멀어진다.
자기 안에 나비가 들어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누에는 그저 자신이 죽는 줄만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누에로 좀 더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을지도 모른다. 죽음과 같은 변화에 대한 저항, 그 속에서 누에는 더 큰 고통과 절망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다른 벌레들은 나보다 오래 사는데 왜 나만 벌써 죽어야 해'라며 부당함에 치를 떨었을지도 모른다. 저항하는데 온 힘을 다 써버려 나비로 변신할 힘 마저 소진해버린다면 누에는 진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짜 끝을.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누에는 자기 몸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걸 느낀다. 고치가 벌어지면서 햇살이 들어오면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빛이 자신의 날개에서 반짝임을 보게 된다.
당신 혹시 지금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 주저앉아 있는가? 변하는 상황을 붙잡고 변하지 않으려고 저항하고 있는가? 이런 당신에게 바이올렛 컬러가 끌린다면 당신은 지금 나비가 되는 중이다. 날개가 돋아나며 느껴지는 통증,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 우리가 흔히 '성장통'이라고 부르는 게 당신을 찾아온 것이다.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질문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가 아니라 "이 상황이 나에게 선물해주려는 게 뭘까?"일지도 모른다.
바이올렛 컬러가 소울 컬러인 당신은 레드의 열정과 블루의 신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의 삶에 대한 열정과 신뢰는 타인의 삶도 물들인다. 이것은 당신이 세상에 봉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줄 때 기쁨을 느끼는 당신, 당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무엇일까?
'삶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게 아니구나. 그저 나를 사랑할 뿐!'
당신이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끌어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당신을 보며, 당신을 느끼며 삶의 비밀을 알게 된다. 당신이 내어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뇌졸중으로 생의 마지막을 완전히 남에게 의존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인내라는 마지막 과제를 배우는 중'이라고 말한다. 죽음 앞에서도 변화를 통해 성장하는 그녀가 지금 당신의 마음을 물들이고 있지 않은가?
당신도 그렇다. 당신의 존재가, 당신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를 아름답게 물들인다.
여행을 하다 보면 폐허가 된 곳을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곳이 주는 묘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한 때는 찬란했겠지? 그래서 지금이 안타까운가? 묘함 속에 안타까움은 아주 조금입니다.
묘한 느낌 속에는 여전히 생이 지속된다는 것에 대한 신비로움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변할 때마다 삶을 얻는 생이 신비롭습니다.